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건영 (문단 편집) == 12.12 군사반란 == * [[https://www.youtube.com/watch?v=HMTQTsPNWYg|육성녹음 1]] * [[https://www.youtube.com/watch?v=khdcZGVm5p4|육성녹음 2]] 1995년 8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이건영을 중심으로 한 전화통화 육성 녹음 약 1시간 15분 가량이 조선일보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 녹음본은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감청한 것인데, 비화기[*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내용을 통화하고자 할 때 쓰는 장치이다.]로 통화한 내용까지도 모두 감청되었다.[* 사실 이 비화기라는게 일종의 [[폐쇄회로]]이므로 [[적군|조선인민군]]은 들을 수 없지만 아군이라면 선 하나만 따면 들을 수 있는 식이다. 이건영도 이를 몰랐을 리 없으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 북괴의 위협 가능성을 의식한 상태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녹음본은 시간이 지난 뒤 한 기무사 직원이 녹음 내용을 듣던 중 12.12 사태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이 신군부에 저항하여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말한 것을 듣고 감복하여 이건영 장군에게 녹음 테이프를 넘겼고, 이를 한 일간지 기자를 통해 1995년에 월간조선이 공개한 것이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3100029|#]] 당시 이건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 소식을 듣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하나회의 불순한 장난(또는 움직임)"'''이라며 분명하게 '''[[반란]]으로 규정'''하여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했고, 그 와중에 혹시나 생길지 모를 아군간의 교전과 유혈사태, 그를 틈타 남침할 수 있는 북한군 등에 대해 대비하면서, 전방 부대의 병력 동원에 대해서는 철저한 전방 경계 태세 유지와 상명하복의 원칙[* 이건영은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유고인 상황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명령 없이는 병력 이동을 일체 할 수 없다고 했고(다만 국방장관도 유고시 국방차관이 대신할 순 있다), 실제로 당시 노재현과 합참의장 및 참모차장도 이건영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반란 발생 후 노재현은 도망갔다가 국방부로 복귀 후 신군부에 회유당하면서 이건영의 생각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녹음본 마지막 부분에 이건영은 노재현과 [[김용휴]] 국방부차관의 호출로 국방부로 가게 되는데, 이는 보안사에서 이건영을 체포하기 위해 노재현을 이용한 것이다. 이미 이건영 본인도 자기가 거기 가면 안전할 수 있을까라고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지만 상관의 달램과 명령이니 울며겨자먹기로 가게 되고, 얼마 안가 3군사령관직에서 쫓겨난다.]에 의해 움직이는 등 FM 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반란군을 막기 위해 자신으로써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 했던 이건영에게는 '''이미 반란 개시 전에 보안사로부터 체포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 이건영의 행동은 어찌보면 FM이긴 하지만, 이때 전방 부대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너무 융통성이 없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 등 찬반 양론이 있다. 전방 9사단 예하 29여단 병력이 이미 전부대 일체 출동하지 말라는 자기 명령을 어기고 서울로 오는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도[* 하나회 구창회가 출동 부대 없다는 거짓 보고를 했지만, 육성녹음을 보면 이미 이건영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보안사의 본인 체포 명령도 어느 순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본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부탁한 사단급 [[충정부대]] 투입을 사실상 거절했기 때문. 물론 이건영 입장에서 보면 저쪽이 저런다고 이쪽까지 전방 부대를 빼는건 국가안보 해악 행위인데다[* 최악의 경우 하나회가 북한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전방 부대의 병력을 빼 올 경우 그야말로 북한군에게 알아서 길을 터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뜩이나 연락도 잘 안되던 국방부 장관이 마지막으로 지시한 내용 역시 병력 출동을 금했던 것이라 유혈 사태 등을 고려해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 결과가 쿠데타군의 서울 진입 허용과 군권 장악, 이후의 군부독재 연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사적으로 볼땐 너무 단기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반란군 서울 진입을 놔둔 결과 '''하루도 안지나 본인부터 반란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이걸 본인의 안위마저 무시한 채 나라 안보부터 걱정했던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반란군 세력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건 아닌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다. 결국 모든 노력이 실패하고 반란군에 가담한 부하들의 배신 등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된 이건영은, 강제 예편 후 54일간에 걸쳐 보안사의 강압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 중인 12월 24일 국방부에 의해 발표된 이건영의 혐의는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허나 위의 육성녹음을 들으면 알겠지만, 아군간에 교전이 생기면 안 된다면서 반란군의 진압을 위해 병력이동을 요청하는 장태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까지 병력이동을 막은 사람이 이건영이다. 한마디로 '''이건영의 혐의는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하나회에서 날조한 것.''' 물론 하나회는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에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없는 혐의를 만들어 숙청했다. 이건영은 이 당시의 일에 대해서 스스로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는지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된 이후에 다른 이들과 달리, 당시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평하거나 회상하는 일을 극도로 꺼려왔다. 1995년 보안사 감청 녹음 기록이 공개되었을 때도, 각 언론사의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으나 "책임자로서 12.12 군사반란을 막지 못 해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53961|사과]]를 한 것이 전부[* 이것도 KBS가 제주도에서 휴가중이던 이건영을 찾아가 갑자기 인터뷰를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지 정식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하고 짧은 서면 입장만 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58318_30705.html|#]]]이다. 참고로 이 녹음본 중 당시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의 불법 군사행동을 막기 위해 제9보병사단 [[참모장]] [[구창회]][* 구창회는 육사 18기로 [[하나회]] 멤버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9사단 30연대장으로부터 삼송리까지 병력을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이건영이 확인차 구창회에게 연락하자, 구창회는 연대 출동 지시는 없다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관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 참고로 이때 30연대의 이동을 지시한 것은 사단장 노태우였다. 이후 구창회는 노태우 정권에서 자신이 속인 이건영의 마지막 보직인 3군 사령관(대장)까지 지냈다가,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청으로 군복을 벗었다.] [[대령]]의 거짓 보고를 받는 통화 내용은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의 해당 에피소드에도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