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관술 (문단 편집) === 사망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이관술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령골학살.jpg|width=100%]]}}}|| || '''골령골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골령골유해.png|width=100%]]}}}|| || '''2020년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유골 구덩이'''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대전형무소에서 2차로 학살당한 이들의 수는 대략 1800명으로 과거사위원회는 추정한다. 이때 대전교도소 4사동에 수감된 정치‧사상범들은 모두 골령골에서 총살됐다. 맨 앞에 끌려 나와 헌병과 경찰이 호송하는 트럭에 탄 이가 바로 이관술이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형무소 간수들과 경찰들은 이관술을 기억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중 가장 거물급 인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관술은 험악한 분위기에 고성으로 호명 당한 후에도 담담히 감방문을 나와 트럭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각오했다는 듯이.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진화위9차보고서5권428쪽.png|width=100%]]}}}|| ||'''진실화해위원회 제9차 보고서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428쪽''' ||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형무소 간수들은 이관술을 시종 평온한 모습을 유지한 특별한 정치범으로 여겼다. 당시 27살 나이로 형무소 특별경비대장이었던 교도관 이준영은 이관술이 ‘지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이관술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 중 가장 거물급 인사였다. 사실 남한에서 수감된 죄수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이관술이었다. 따라서 헌병사령관 송요찬의 지시를 받아 헌병대의 학살명단 맨 앞에 놓인 것도 바로 이관술이었다. 형무소 내의 수형자 인솔을 책임진 이는 이준영 교도관이었다. 그는 특별경비대장으로 형무소에서 학살 현장까지 동행했으며, 국군과 경찰이 총살하는 모습을 모두 목격했다. 그는 학살당한 이 중 이관술의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떠올렸으며, 2009년 과거사위원회 참고인으로 조사받으면서 그날의 기억을 전달했다. 가장 먼저 총살당한 이는 이관술이었다고 현장을 목격한 이준영은 증언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총살 직전 지휘관 심 중위가 이관술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용현은 이관술의 이름을 거칠게 부르며 시선을 끌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 한마디 할 기회를 준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조롱을 섞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의향이 있냐고 윽박질렀다. 왜냐면 형무소 내에서 탈옥을 시도했던 다른 수형자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것을 빗댄 것이다. 이관술은 잠시 생각을 마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진 못하겠으나 ‘조선 민족 만세’를 부르겠다는 답변이었다. 이 말에 주변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과거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골령골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그 어떤 것도 적법한 과정을 밟은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짐작되는 ‘탑 레벨’에서 내려온 명령이 법적 명분의 전부였다. 이관술이 포함된 7월 3일의 첫 번째 총살이 집행된 후 심용현 중위는 직접 권총을 뽑아 뒤통수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한때 일경에 쫓겨 다니며 조직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대전의 한 골짜기에서 처형당할 당시 이관술의 나이는 48세로 9년여의 감옥살이와 10년여의 도피생활로 반생을 바친 불우한 인생은 그렇게 끝났다. 울산이 낳은 신동으로, 중동을 빛낸 수재로,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장남으로 탄탄하게 열렸던 미래를 접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들었던, 바위 위의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한 이상주의자는 그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이관술이 아내와 큰딸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사라져갔던 그 대나무숲이다. 이관술의 친할머니 조정숙은 이관술이 오랜 세월 도피와 감옥생활을 할 때 매일 새벽마다 대밭에 물을 떠놓고 '우리 관술이 잘 되게 해주이소' 하며 빌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이관술이 이미 처형당한 줄 모르는 채 생환해 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할머니의 기도 소리에 응답하듯, 대나무는 매일 울었다. 평소 분파주의의 비판을 받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만일 북한으로 넘어갔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가장 위험한 자리를 지키던 그가 개인의 안전을 위해 월북했을 리 없고, 실제로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고도 월북을 거부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지만, 파렴치한 위조지폐범으로 몰림으로써 그는 씻기 어려운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로부터 잊혀져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