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관술 (문단 편집) === 장성운, 인물기행 문화기행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전 [[울산매일]]신문 편집국장)이 1995년 <인물기행 문화기행>에서 이관술에 대한 기억을 복원했다. 장성운은 "이관술 씨의 열병에 시달"리며 이관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왔는데 무려 쓰쿠바대학까지 건너가 사정하여 어렵게 이관술의 성적표를 보고 성적을 알아오기도 했다. 참고로 성적은 좋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필자는 1994년 여름 내내 이관술 씨의 열병으로 시달렸던 사람이다. (중략) 나는 이 씨를 단순한 공산주의자로 남로당 재건을 위해 활약했던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중략) 그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아직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들과 하루 이틀 얘기를 하다보니 이 씨의 삶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략) 따라서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가 밝히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발굴은 아직 그에 대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피붙이가 있고 또 흔적이 남아 있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지난 여름 이 씨를 취재하면서 그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세로 뛰었다. 이런 결심은 이 씨의 행적이 나타난 것이 없기에 더욱 보람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다. 취재의 어려움 중의 하나는 국내외에 그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이 씨의 행적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야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야사마저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현재 이 씨의 행적을 그나마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는 가능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친인척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이경환 씨까지도 처음에는 전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사가 이들이 단지 이 씨의 혈육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취재를 하면서 이런 사실들 때문에 이 씨에 대한 역사적 정의가 바로 내려져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야사는 확인과 실증을 통해 정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뛰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장성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