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관술 (문단 편집) === 경성 콤그룹 활동 === 이후 이관술이 지도하게 되는 비밀결사 경성콤그룹이 활동한 시기는 전시체제 하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해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전향하던 시기이다. 이전까지의 사회주의운동은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전시체제에서는 총독부 기관지 이외의 신문이 폐간되었다. 이관술의 1930년대 반제동맹, 경성트로이카 활동은 항상 대서특필되었지만 경성콤그룹은 언론이 없어서 보도조차 되지 못할 만큼 폭압적인 시대였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이관술은 혼자 전국을 누비며 활동가를 모아 공산당 재건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일급 수배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관술의 혁명가로서의 재능 덕분에 가능했던 놀라운 일로, 김태준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 지하운동의 레코드를 깨뜨리고 있던 것"이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일본 경찰은 혈안이 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시외에까지 수사망을 펼쳤다. 시내에 잠복해 있을 가능성과 경성을 벗어나 지방으로 도주할 가능성을 다 같이 고려했다. 강도 높은 수색 작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진척이 없었다. 일본 경찰들 속에서는 동요가 일었다. 이번 단서로는 체포하기 어렵고 뭔가 새로운 단서를 얻을 때까지 날카롭게 주시하자는 비관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관술은 지하운동의 천재였다. 1931년부터 해방 때까지 15년간 일본 경찰의 수배망을 뚫고 쉼 없이 비합법 조직활동을 계속했다. 놀라운 기록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임경석]],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085.html|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2022}}}}}} 동생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수원에서 접촉한 뒤 1939년 1월 초 충주에 있던 [[김삼룡]]을 찾아가 새로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후 경성에서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과 태창직물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6개의 공장 세포와 10개의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형성한다. 이들이 활동을 재개하자 [[이현상]]과 [[권오직(1906)|권오직]]이 합류한다. 1939년 4월경 [[경성 콤그룹]]의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39년 5월에는 석방된 [[박진홍(독립운동가)|박진홍]]과 정태식도 가담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모임 교재 『노동자 리플렛』을 집필하고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8.1 캄파니아 투쟁지침서'를 만든다. 이관술은 이론적 지도와 기관지 책임도 맡았다.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히게 된다. 이관술은 「경성형무소의 반항사건을 보라」, 「남해제사의 동요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 「예방구금령에 대하여」 등 기사를 직접 쓰면서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간다. 이관술은 특기인 변장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고생이 심했는지 지방에 다녀오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강점기엽서청진항.jpg|width=100%]]}}}|| ||'''일제강점기 엽서에 담긴 청진항 모습. 경성콤그룹 이관술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다.''' || 기관지는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아래의 월간 출판물이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를 말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문제와 여비문제로 고물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순금}}}}}} 이관술이 헌신을 다해 만들고 지킨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말기 가장 대표적인 항일운동 조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https://m.blog.naver.com/chal379/221544022841|#]]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으로서 일제에 꺾이지 않고 버틴 활동가들이 대부분 합류한다. 또한 이관술과 김삼룡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있어 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실제로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었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운동을 근간으로 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http://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01205650108|#]] 한편 당시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출소해 있었다.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고 한다. 이관술은 1939년 12월 12일에 박헌영을 만나고 경성콤그룹에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의 동료교사인 신명균과 교류하며 [[조선어학회]]와의 연대도 모색했다. 이관술은 그 후 함경도로 가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 조직,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 등에 착수하고 노조를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이관술은 함경도에서도 변장과 도피의 귀재답게 활동한다. 이관술은 광부들을 조직하여 자신이 쓴 팸플릿으로 학습을 지도한다. 많은 광부들이 조직되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 이관술은 노동자들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한다. 주을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도모한 일이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이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 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隊) 조직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예의 서대문서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김태준 동무의 집에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김삼룡과 이현상이 체포되자 이관술은 이를 수습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이관술은 대담하게도 구두닦이를 가장해 서대문경찰서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며 동정을 살폈다고 한다. 이관술은 [[김태준(1905)|김태준]]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1941년 1월 7일이었다. 일제 경찰은 수배 6년만에 붙잡은 이관술에게 기록적으로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데, [[경성재건그룹]](경성트로이카)의 핵심이었고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로 다른 조직원이 모르는 정보도 이관술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긴 기간 수많은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당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항일혁명운동가 이관술이 지닌 위상은 매우 컸다. 이재유와 함께 지도부로 나섰던 경성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와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경성콤그룹은 모두 일제 경찰의 검거대상 중 맨 첫머리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관술은 일제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조직도에서 맨 꼭대기에 놓였던 이 아닌가.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성콤그룹피고인명단.jpg|width=100%]]}}}||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순으로 핵심적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고문도구.jpg|width=100%]]}}}|| || '''일제가 사용한 고문 도구들'''[[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8594|출처]] || 이관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중 가장 악명높은 고문기술자는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일제 고문 기술의 70%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못상자]] 고문 등을 사용했다.[[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84216|#]] [[노덕술]]은 독립운동 수배자 중 최상급에 속하는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다.[[http://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75944267075|#]] 이례적으로 요시오카 사다지로 경부가 지휘하며 노덕술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기술자들이 동원된 6개월간의 이관술 고문 취조 현장은 어찌나 치열했는지 다른 경성콤그룹 간부보다도 두세 배 많은 27회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격렬한 고문을 당하며 엄청난 양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나올 정도로 온갖 문제를 추궁받으면서도 이관술은 조직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미 소련에서 죽어 경성콤그룹에 전혀 가담한 바 없는 [[김단야]]가 상급자라며 허위 정보를 흘려 수사에 혼선을 줬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 신문조서는 체포된 뒤 이관술이 1941년 1월7일부터 7월20일까지 6개월 남짓 기간에 경찰에게 어떻게 취조받았는지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자료가 된다. 7년이나 추적한 거물 수배자를 체포한 경찰에도 이관술 취조는 여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어야 지하운동의 비밀을 파악할 터였다. 고문을 해서라도 비밀을 캐내야 했다. 따라서 취조 현장은 경찰의 추궁과 체포된 혁명가의 진술 전략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현장이었다. 그 취조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조서 분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제4~27회의 조서 분량은 70~120쪽에 걸쳐 있다. 평균 100쪽 안팎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회는 186쪽, 제2회는 164쪽, 제3회분은 194쪽에 이른다. 초기 3회에 걸쳐 가장 강도 높은 취조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 신주백의 논문을 말한다.]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임경석 교수가 쓴 《임경석의 역사극장: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214.html|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독립운동가가 일제를 속인 이야기는 통쾌하다. 기지 있고 태연하게 연기를 잘하는 이관술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관술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것에 비해 허위 진술로 덮을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였으며 조직원에 대한 진실된 정보는 전혀 발설하지 않았기에, 이관술은 계속 고문실에 묶여 전문적인 고문기술을 받아내며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경성콤그룹 3차 검거 사건인 홍인의 외 45인 사건 시에도 조직 수괴 이관술은 이번엔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1942년 2월 10일부터 5월 13일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이 때 피의자신문조서 7회가 더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관술 조서는 서대문경찰서 피의자신문조서 27회 + 종로경찰서 피의자신문조서 7회 + 피고인신문조서 15회. 조서를 쓸 땐 고문을 가했으며 이관술의 조서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동지', '기관지 배포선(조직 연락망)은 모른다', '신뢰하지 못해서 동지로 만들지 않았다' 등 정보를 숨기려는 내용이다. 경찰이 조직 수괴가 동지 이름도 모르고 기관지 배포선도 모른다는 말을 순순히 믿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관술이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치서 등을 보면 결국 이관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심에서도 이관술 피고인신문조서 15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의 독방에 감금되었는데 당시 독방은 매우 좁고 열악해서 경찰이 제일 싫어하는 사상범을 학대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독방에 있을 때는 보고싶은 딸들과 편지를 하는 기쁜 순간도 있었지만, 국내 지하운동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관술은 다른 국내 항일운동가들이 잡힐 때마다 같이 고문당하며 투옥 기간 내내 고문실과 의무실을 전전해야 했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창건자로 투옥 기간 내내 다른 연루자들이 드러날 때마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노덕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게 버텼다. 이 때 1941년 검거되어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3년 가까이 극한의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을 무수히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낸 이들에게 일제 경찰은 고문강자라는 ‘명예’를 붙여 주었는데 최고의 영예를 이관술이 안았다고 한다.[* 출처: 안재성, 혁명가 열전, 월간『좌파』제5호 2013년 9월호]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반제동맹, 경성콤그룹 사건 때)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https://www.joongang.co.kr/article/2426766|#]], [[http://naver.me/xOvZtdHI|##]]}}}}}} 1941년 붙잡혔는데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될 때 이관술은 고문실에 있었다. 고문실에서 고문으로 얻은 폐병으로 피를 토해서 병보석되었는데, 이관술은 장난기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관술 인터뷰를 보면 고문실에서 커피를 물고 있다 뱉었다 등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했는데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피를 자주 토했고 사촌여동생 이차선에 따르면 피가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실 정도로 피를 많이 토했다고 한다. 서대문사건을 시작으로 박진홍 등 중간 지도자들이 검거되어 조직은 급속히 마비되었다. 검거된 조직원은 150명이 넘었다. 한편 이관술의 할아버지는 이관술이 공덕리에 숨어살 때 세상을 뜨고 계모는 수배 중일 때 사망했으며 아버지 이종락은 이관술이 체포된 이듬해인 1942년 2월 6일 사망한다. 이관술은 그 어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 체포된 지 3년 만인 1943년 12월 말 오랜 고문에 따른 고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는 일이 잦자 석 달 간 치료를 위해 가석방된다. 감옥 안에서는 더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이다. 당연히 일제의 일급 요시찰 대상이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그는 항상 말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은 가장 옳은 죽음이며 죽음을 각오한 때에는 고난도 쓰라림도 무서운 총칼도 다 극복되는 것이며 용감한 행동을 행할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투쟁하였으며 그 행동은 말과 조금치도 틀림없이 일치하였다. 1941년 정월에 오빠는 드디어 놈들의 손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야만과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주지 않은 것은 그와의 관계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감옥 투쟁 속에서 거의 죽게 되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되었다. 그의 건강은 참으로 위독하였다. 누가 보든지 절망적이었다. 그는 결심하였다. 어떻게든지 살려고, 조선민족해방 투쟁에 좀 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지금 죽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겠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는 또다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이때는 전시 계엄령 상황으로서 지하생활이 가장 곤란한 어마어마한 때였다. 솥땜장이, 남의 잔심부름꾼! 이런 가지가지의 고생을 하면서 혁명운동을 여전히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투 속에서 8.15 해방이 닥쳐왔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이순금}}}}}} 이 때 이관술은 이순금에 따르면 만신창이가 되어 생명이 위태로웠으며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울산의 명의 안효식이 이관술을 정성껏 치료해주고 간호해줬다.[* 안효식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탄압당하자 자살한다.] 그런데 이관술은 병보석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멘 후에도 몸이 조금 회복되자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그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이재유와 공덕리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나 경찰서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거꾸로 경찰을 감시했다는 등의 일화들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방문한 손님들에게는 입을 깨물어 피를 냈다는 식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해서 실제로 피를 많이 토했다는 사실은 집에 오래 있었던 손님만 알았다고 한다. 1944년 3월 31일 병보석 기간이 만료되었으니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관술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잠적하는데 이관술 딸 정환이 그녀의 외동딸에게 그날 밤의 기억을 말해준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큰딸 정환은 이미 전날 저녁 아버지가 집을 떠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을 때 이관술은 아내와 딸들이 잠든 방에 들렀다. 불이 꺼져 깜깜한 가운데 조용히 들어온 그는 어둠 속에서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딸들은 잠들어 있었으나 박가야와 정환은 깨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딸들이 깨지 않도록 잠든 듯 가만히 누운 채 어둠 속에서 이관술을 지켜보았다. 이관술은 한참이나 정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뒷문을 열고 조용히 빠져 나갔다. 남편이 뒷마당 장독대 주위에 가득한 대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린 후에야 박가야는 자리에 누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리 나가시면 이제 영영 몬 들어 오실기다." 정환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흐느껴 울었다. 정환은 유난히 대나무 숲이 울던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이관술이 사라졌다는 걸 알자 경찰은 이관술 가족과 친척, 이웃을 연행해갔다. 가족들은 물론 입암에서만 아홉 명이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고모가 사는 망성 마을 사람들까지 경찰서에 끌려갔으며 삼촌은 마침 출타 중이었는데 붙잡혀 고문당할까 두려워 그 길로 도주해버렸다고 한다. 심지어 부산 사는 사촌여동생은 임신중인 몸으로 모질게 고문을 당했다. 또 이관술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매일 집에 찾아와 군화발로 온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들을 흩어놓았다. 이관술의 사진과 편지를 모조리 압수해갔고 서가의 책도 불온서적이라고 뽑아갔다. 가족들은 그 와중에도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 졸업앨범과 이순금의 동덕여고 졸업앨범을 마루 밑을 파서 깊숙이 묻어놓아 보존했다. 이관술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여서 멀리 달아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사일마을의 사일 서 씨 집안에 숨어 있었다. 회상기에 따르면 그 뒤 솥땜장이의 심부름꾼이 되어 전라도 산중으로 촌사람들의 솥을 때워주며 다녔다. 이 때는 일제 말기로 전향공작이 극심했던 시기라 이재유를 비롯한 이관술의 동지들은 줄줄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나간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관술이 폐병에 걸린 채 거지나 다름없이 남부지역을 떠돌고 있는 사이 이재유는 감옥에서 사망한다. 박영출은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한때 재건그룹의 상부 트로이카를 이뤘던 세 명 중 두 명이 사망한 것이다. 경성콤그룹을 함께했던 김덕연과 김재병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다. 동덕여고에서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이윤재(국어학자)|이윤재]]와 신명균도 죽는다.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일제에 순응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느니만도 못한 일이었으리라. 이관술은 동지들의 죽음을 비수처럼 가슴에 꽂은 채 울분과 통한의 유랑생활 16개월 만에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44/index.html|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이현상]]도 옥중 단식투쟁의 결과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가 신기하게도 도피에 성공하여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이렇게 탈출한 이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박헌영이 광주에만 있던 것과 달리 경성콤그룹 재건의 주된 장소는 대전이었다.[*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 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작가)|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56/index.html|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광복의 순간에도 이관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대담하게도 대전 경찰서 앞에서 신기료장수로 변장해 경찰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출처: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즉 이관술은 일제의 고문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국내에서 해방의 날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런 독립운동가는 극소수이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cccccc dashed; border-left: 5px solid"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