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필 (문단 편집) === 초기 === 이광필은 당에 부용하던 거란족 추장이었던 이해락[* 이광필의 어머니는 [[이해고]]의 딸로, 곧 이광필은 이해고의 친외손자가 된다.]의 아들이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무려 4개 절도사직을 겸직하면서 천보 연간에 가장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쥐었던 [[왕충사]](704~749)의 휘하에서였다. 왕충사는 [[가서한]]과 이광필을 중히 여겨 주요 부장으로 삼았고 이 둘은 뛰어난 능력으로 대 [[토번]] 및 대 [[돌궐]] 전역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왕충사는 당 현종의 석보성 공격 명령을 거절하여, [[이임보]]의 참소를 받게 되자(747) 이광필은 직접 왕충사에게 찾아가 [[선물]]을 뿌려서라도 주변의 참소를 막으라고 권했지만 왕충사는 이를 듣지 않았다.[* 당시 왕충사는 석보성을 지금 공격하면 아군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는데, 그 말대로 거절 후에 후임인 가서한이 명령을 수행하자 수 천 정도만이 지키고 있던 석보성을 수만의 피해를 입으면서 점령하게 된다. 왕충사는 후에 '태자를 황제로 세우려 들었다' 는 참소까지 엮여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국문을 받았으며, 결국 가서한이 현종을 직접 만나 무죄를 청원하여 간신히 한양태수, 한동군태수직을 맡다가 749년 사망한다. ] 이후에도 이광필은 북방의 주요 무장으로 활동하여, 749년에는 하서절도부사직을 맡았고 754년에는 당시의 삭방절도사였던 [[안사순]][* 안사순은 [[정천리]]와 함께 이헌충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삭방절도사직을 연임했다.]의 천거로 삭방절도부사직에 올랐으며 안사순과 혼인으로 인척관계에 오를 뻔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광필은 병이라는 핑계를 대고 잠시 장안으로 귀환했다가 돌아와 병마사 직을 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