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필 (문단 편집) === 안사의 난 이후 === [[안사의 난]]이 종료되었을 당시 이광필은 임회왕이라는 봉작과 그에 걸맞는 직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공적은 초상화가 [[능연각]]에 걸리기까지 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으로 군왕의 봉작을 받은 인물은 곽자의, 이광필, 복고회은의 단 셋 뿐으로 이 셋은 그야말로 반란 진압의 최고의 공로자로 대접받았다. 특히 이광필은 곽자의와 군공이 대등하다 할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에서 분투한 이광필의 공로가 그만큼 크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안사의 난이 종료되면서 이광필과 당 조정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는 곽자의를 제외한 여타 절도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정원진이라는 [[권신]]이 당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진은 주요 절도사 중 한명이었던 내진을 속여서 끌어들인 다음 처형해 버렸는데, 이 일은 절도사들로 하여금 당 조정에 대해 크게 불신하고 두려움을 가지게끔 하였다. 이로인해 토번의 장안 침공이 있었던 당시 이광필은 당 조정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곧 엄정하고 상명하복에 철저했던 이광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었다. 이광필의 힘이 어려움에 빠진 당 조정을 구원하기에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자, 부하들 또한 이광필의 이런 모습을 핑게로 명령에 불복종하기 시작한 것. 부하들의 불복종이 심해지자 이광필은 분노하였고, 그것이 울[[화병]]이 되었는지 764년 7월, 사망한다. 후대 사람들은 이광필의 죽음을 두고 정원진과 어조은의 참소와 정치공작으로 인한 분함과 억울함이 화병을 일으켜 죽었다고 생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