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환 (문단 편집) == 기타 == * 야생마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이 [[김성근]] 감독과 함께 제일 존경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이상훈의 현역 시절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긴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했던 인물도 이광환이었는데 그 고집 세고 강하던 이상훈도 이광환의 말에 바로 수긍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실제로 이상훈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KBS N 스포츠의 다큐 '더 레전드'를 보면 1996년 시즌 중 이광환 감독이 중도에 경질됐을 때 [[https://youtu.be/42wHSBjkKeI?t=1470|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광환 감독 경질이 후반기 성적 부진의 원인이 됐다]]고 이상훈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 저명한 야구기자였던 [[이종남(기자)|이종남]] [[스포츠서울]] 이사가 그의 열혈 지지자였다. 덕분에 그는 'LG, 이광환, 자율야구'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고 그가 저술에 참여한 '[[한국야구사#s-1|한국야구사]]'에서 [[1996년]] 이광환의 경질 이후 [[천보성]] 감독의 부임에 대해 '찬탈'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사용했었다.[* 이종남 기자는 인천 제물포고 출신으로 골수 인천야구 팬이었다. 관련 책이 나온 것은 순전히 이광환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다. 덤으로 이종남 기자는 감성에 호소하는 스토리텔링 위주의 글을 많이 쓴 사람이다.] * 주간야구에 연재한 회고록을 보면 반골 혹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기질이 있어 보인다.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현 상원고)]]에 입학한 이광환은 모 교사가 감독을 쫓아내고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반발해 동료들과 전임 감독을 모셔오려고 했으나, 선배의 회유에 넘어간 동료들의 배신을 목격하고는 그들과 같이 야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대구를 떠나 서울 [[중앙고등학교 야구부|중앙고]]로 전학했다. * 그 시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바로 [[실업야구]] 팀으로 입단하는 게 성적 좋은 선수들의 일반적인 코스였는데, 이광환은 실업 팀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고집했다. 그가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후 점차 대학진학 선수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 [[고려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시위 현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또래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는데 공권력이 탄압하는 것을 보면서 불의하다고 느껴 참여해 투석전을 벌였다. 하지만 현역 야구 선수의 손에 들려진 돌맹이는 엄청나게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붙잡혔을 때에 몇몇 경찰이 알아보고 말았다. '이 친구 돌을 매우 잘 던지던데?'. 그날 경찰서에서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이후 신문에도 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이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 히어로즈 창단시에 감독을 맡은 게 현장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8개구단 존속을 위해 1년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취임했다고 말했다. 고려대 후배인 [[박노준]] 단장과의 인연으로 되었다는 것이 정설. 해당 팀 팬들에게는 아무것도 안하는 감독으로 기억되기도. 사실 [[박노준]]과 이광환 등이 생각했던 단장이 운영을 맡고, 감독은 관리를 하는 소위 말하는 [[단장]] 위주의 운영 스타일 기준이라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면 안 되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그런 점에서 이광환은 적격인 인선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때 영입된 인사들은 대부분 거물급으로 취급받았다.[* 이광환 감독과 함께 취임했다가 같이 물러난 인물들만 보면 수석코치 [[이순철]], 2군감독 [[강병철]], 배터리코치 [[장채근]], 그 외에 [[김정수(1953)|김정수]], [[장광호]], [[김종수(1957)|김종수]]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그 비용도 다른구단보다 적었다. 감독 이광환이 다른 팀 수석코치 수준인 계약금 1억에 연봉 1억의 총액 2억이었고, 역시 감독급 인사인 [[강병철]]과 [[이순철]]도 일반적으로 다른 팀 코치 수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단장 위주 운영이 페이퍼 플랜으로 끝났고 결국 얼굴마담에 그치면서 놀고 먹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하나 건진 건 [[강정호]]의 포텐셜...... * 그러나 유망주들에게 혹독하게 대하기도 하며 본인이 밝히길 터치를 많이해서 성장하는 선수와, 그렇지 않은 타입의 선수들을 구분해서 각각 맞춤식 조련을 시전한다고... * 글재주가 있는 듯. 가끔씩 올라오는 그의 야구 관련 에세이 들도 꽤나 읽을 만 하다. '''그러나''' 공통되는 평가는 처음에는 뭔가 있어보이는데 중간까지 잘 가다가 갑자기 결말이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글 쓰는게 [[조루]](...) * 야구계에서 잊혀진 인사들을 다시 불러주는 대인배로도 유명하다. [[한화 이글스]] 감독 시기에는 [[선수협]] 문제로 찍혀서 사실상 야구판에서 추방된 [[최동원]][* 19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선수협 창단을 준비하다가 KBO와 각 구단들의 방해공작으로 무산되고,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이른바 1차 선수협 사태이다.]과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야인이 된 [[윤동균]]을 코치로 불렀다. 우리 히어로즈 감독 시기에 [[이순철]]을 데리고 있었던 것 역시 이광환 감독이어서 가능했다는 평도 있다. * 2010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유영구]] 총재의 위촉으로 그간 KBO에서 맡고 있던 여자야구 발전 분야를 떠나 새로이 야구 지도자 연수 분야를 맡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부설 [[베이스볼 아카데미]] 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 동시에 [[서울대학교]]에 출근하게 된 김에 [[서울대 야구부|야구부]]의 감독도 겸임하게 되었다. 출근하자마자 눈에 띈 [[서울대학교 야구장]]의 열악한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현재 [[서울대학교 야구장|서울대 야구장]] 시설 개선 운동에 진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 8월 23일, [[서울대학교]] 내 28개 야구 동아리가 소속되어 있는 [[서울대 스누리그]] 관계자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서명운동에 들어가기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623672|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2162403|동아일보]] * [[경인방송]]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를 중계하던 시절인 1999년에 해설자로 뛰기도 했다.[* 1998년 해설진으로 참여했던 박해종(前 OB 베어스) 위원의 밑천 드러나는 실력(...)과 스포츠서울 문상렬 기자의 미국 파견으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문상렬 기자의 후임으로 [[송재우]] 해설위원이, 박해종 해설위원의 후임으로 이광환 감독으로 바뀌어 1999년 중계진을 꾸렸다.] * 2013년 8월 30일에 간만에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80&article_id=0000000398&m_url=%2Fcomment%2Fall.nhn%3FserviceId%3Dsports%26gno%3Dnews380%2C0000000398%26sort%3Dlikability|"현장에만 정답이 있는 게 아니더라"]] 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나이 들어서 자꾸 욕심내면 안 돼요. 후배들이 할 일이 있고, 나이 먹은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꼭 현장에만 있어야 야구판을 위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라는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읽은 누리꾼들은 [[김응용|이 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으로 추측중. 1948년생인 이광환 감독과 비슷한 연배 혹은 선배 세대들은 대부분 은퇴 상태이고, [[김성근]]은 야구관은 정반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사이가 나쁘진 않고, 더구나 이미 프로야구를 떠나서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감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외에 이광환이 나이 먹었다고 이야기 할만한 현역 프로감독은 [[김응용|이 분]]밖에 없어서...~~하지만 정작 김응룡은 금방 은퇴해서 야구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고, 독립야구단에 있던 김성근이 현역으로 복귀해서 2015,16년 초반 최악의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 학원스포츠와 아마추어 야구계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이다. 사사건건 반목하기 일쑤인 프로계 인사와 아마추어 야구계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 그 때문인지 학원 스포츠와 아마추어 야구계 내부의 이슈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곤 하는 몇 안되는 프로팀 감독출신 인사이다. *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동대문야구장]] 철거 계획을 발표하자, 야구계가 결사반대하고 나서는데, 이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야구계에서 고대 출신인 오세훈 시장을 고려해서 역시 고대 출신인 이광환을 내세웠다고 한다. ~~고대라면 [[허구연]]도 있는데...~~] 서울시와의 협상 끝에 "2009년까지 2만명 규모의 대체야구장과 기타 간이야구장 포함 7면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2만명 규모 대체야구장은 2009년까지 착공도 하지 못했고, 광진구 구의야구장은 관중석도 없는 간이야구장에 그치면서 공염불로 끝나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동대문야구장 대체용으로 시작한-- 2만석 규모의 아마추어 전용 구장은 넥센 히어로즈가 입주한 [[고척 스카이돔]]으로 끝나고[* 고척 스카이돔은 시기가 맞물려서 그렇게 보였을 뿐 애초에 동대문야구장의 대체와는 거리가 먼 전혀 별개의 사업이었다.], 아마추어 야구계는 목동야구장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 2016년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2016 기장여자야구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 [[김용수]]에게 있어서는 은인이다. 30대 중반의 김용수에게 고정 마무리 투수 보직을 주면서 선수생활을 연장시켰고 덕분에 [[오승환]] 이전의 국내 최다 세이브 기록(227 세이브)을 세우며 40대 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MBC-LG 구단 역사상 1호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게 된다.[* 하지만 김용수는 선수 말년에 만난 [[이광은]] 감독과 선수단 장악 문제를 두고 불화를 이룬 탓에 영구결번 헌액자였으면서도 2000년 시즌 후 은퇴식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유니폼을 벗게 되는데 이 사연에도 이광환이 연결돼 있다. 당시 LG 선수단의 팀 컬러는 이광환식 자율야구가 녹아들어 있었지만 [[이광은]] 감독은 LG 선수들에게 옛 스승 [[김동엽(1938)|김동엽]] 감독의 ~~쌍팔년도식~~ 관리야구를 길들이려하다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자 선수단 최고참인 김용수가 항명했던 것.] 이후에도 김용수가 지도자 연수에서 돌아오고 이광환이 2003년 LG 감독으로 컴백하자 김용수를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또 김용수가 중앙대 감독을 하다가 심판 뇌물 제공으로 야구위원회에게 자격정지를 당해 쫓겨나고 야인으로 있게 되자 이광환이 서울대 교양 강사로 영입하는데 힘을 써줬다.[* 자격정지 때문에 코치 감독 등 야구관련 지도자로는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KBO 리그]]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서울특별시]]를 [[두산 베어스|연고로 하는]] [[LG 트윈스|3개]] [[서울 히어로즈|구단에서]] 모두 감독직을 경험한 바 있다.[* 2개의 서울 연고 구단에서 감독을 맡은 사람은 몇 명 있다. [[김성근]] 감독은 히어로즈가 창단되지 않았던 시대에 [[OB 베어스]]와 [[LG 트윈스]] 감독을 맡은 경험이 있다. [[김재박]]은 [[현대 유니콘스]]와 [[LG 트윈스]]에서 감독을 맡았는데 현대 감독 재임 중반 시절이던 2000년부터 현대의 서류상 연고지는 서울이었다. 다만 현대 구단이 기존 서울팀이던 LG와 두산에 권리금을 내지 못해서 실질적 서울팀은 되지 못했다.] * 아들 이현석도 야구선수였다. [[중앙고등학교 야구부|중앙고]] 시절 서재응 - 김병현 - 최희섭이 포진한 광주일고를 상대로 전국대회 준결승에서 대결해서 패했다. 고3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1996년 당시에는 정해진 인원제한이 없이 무한대로 선수 지명이 가능한 마지막 해라 지명순위는 무려 21순위였다.][* 그해 신인지명에서 해태는 23순위, [[쌍방울 레이더스]]는 8개 구단 최다인 27순위까지 지명했다. 해태 지명선수 중에는 장성호(1순위, 충암고), 곽현희(4순위, 배재고-영남대), 권오성(6순위, 신일고-고려대), 최길성(7순위, 배재고), 양현석(9순위, 동대문상고), 홍세완(11순위, 장충고)이 프로에서 활약했다.] [[영남대학교 야구부|영남대]]로 진학했고 해태에서 지명권을 포기하여 해태 유니폼을 입지 못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