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광환 (문단 편집) === LG 트윈스 감독 1기 === 이후 1992년 [[백인천]]의 후임으로 서울 라이벌 팀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광환 특유의 자율야구가 LG 선수들에게 확실히 녹아들며 이른바 '''신바람 야구'''의 선봉장으로 팀을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실 이광환도 1992년에는 팀이 7위를 기록하면서[* 참고로 1992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순위이며 1위는 빙그레, 2위는 해태, 3위는 롯데, 4위는 삼성, 5위는 OB, 6위는 태평양, 7위는 LG, 8위는 쌍방울.][* 참고로 1992년 4월 30일에 경기 종료 후 관중들이 LG 구단버스를 부수며 '''무능한 LG 이광환 감독은 물러가라'''라는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팬들에게 많은 욕을 얻어먹었지만, 1993년에 한때 1위 [[해태 타이거즈]]를 턱밑까지 추격하면서 위협하는 등 선전하다가 4위를 기록했고 준 PO에서 OB를 꺾은 뒤, 삼성과의 PO에서 [[윤찬]]과 [[김선진]]의 주루사[* 주루사가 나온 두 경기에서 1점차로 졌다.]만 아니었다면 한국시리즈에 오를 뻔 했다. 1994년에 그야말로 신내림한듯한 야구를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기에 그의 철학이었던 자율야구와 스타시스템이 조명받게 됐다. 시즌 종료 후 LG와 재계약에도 성공하면서 당시 신흥 명문구단으로 급부상했던 LG구단의 첫 장수 감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다. 그러나 1995년 시즌 중반에 2위 OB와 6게임차까지 벌어질 정도로 여유 있는 1위를 독주하고 있었음에도 이광환은 이해하기 힘든 조급증을 보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기마다 원칙없이 바뀌는 라인업과 [[좌우놀이]]는 물론이고 1994년의 주역이었던 선발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이 부진으로 라인업에서 이탈하자 이광환은 당시 선발진을 3일 휴식 후 등판시키는 4일 로테이션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선발진, 특히 [[에이스]]였던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에게 엄청난 부하를 줬던 것은 물론이고[* 당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은 시즌 중반까지 20승이 거의 확실해보일 정도로 절대적인 페이스를 보이고 있었지만 4일등판이 시작된 이후 승수를 쌓는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다가 시즌 최종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기록했다.] 자신의 투수 보호 원칙을 스스로 깨는 비합리적인 운영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팀은 막판에 엄청난 추락을 거듭했고 페넌트레이스 최종성적은 OB에게 반 게임차 2위였으며[* 당시는 타이브레이크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만약 반게임차가 아닌 승률 동률의 공동 1위가 되었다면 그해 LG는 OB에게 11승1무6패로 앞섰던 상황이라, LG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할 상황이었다.] 체력이 고갈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은 [[KBO 플레이오프/1995년|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자이언츠]]한테 난타당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다.[* 막장운영만 아니었다면 LG는 95년에도 우승했을 것이고 그이후에 팀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996년 들어 이상훈의 척추분리증 이탈과 마운드의 노쇠화 등이 겹치고 전년도보다 더한 막장 운영으로 팀이 7위까지 떨어지는 결과를 보이자, 시즌 도중 LG 감독직에서 경질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