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후일담 == 손권이 죽은 직후 손패파의 일원인 손홍은 주거를 죽였던 방법처럼 거짓 조서를 만들어 [[제갈각]]을 죽일 계획을 세우지만 그 자리에 있던 손준이 이 사실을 제갈각에게 보고했고, 제갈각은 손홍을 불러 자문을 요청한 다음에 대답하지 못하자 바로 그를 죽여버린다. 그 후, 권력을 잡은 제갈각이 잘 나가면서 손화파에게도 빛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253년 합비신성 공략 실패로 제갈각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손준의 계획으로 제갈각과 그의 일족은 주살되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때 제갈각의 심복이 장약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장소의 차남 장승의 아들 장진이었다. 그 또한 죽었다.], 손준이 권력을 잡아손패파인 손준+손노반+전씨일가라는 세력이 세워진다. 이렇게 써놓으니 손패파의 집권을 위해 손준이 제갈각을 제거한 것 같지만, 손준은 애초에 파가 다르긴 해도 제갈각과의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손홍을 처리할 때도 둘이 힘을 합쳤었고, 그 전에 손량이 황제가 되었을 때 제갈각이 권력을 잡은 것 부터가 손준이 손권에게 추천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에서 패한 제갈각이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엇나가버려서 손준이 황제 손량의 동의 하에 제거한 것이다. 즉 이건 제갈각이 손화파여서가 문제가 아니라 대놓고 손패파였던 이들이 손을 잡자고 나섰는데도 폭주한 제갈각이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제갈각이 뒷배로 있던 손화도 죽이고 [[손노육]]도 죽이며 육손이 죽은 이후 제갈각이 영수였던 손화파 정리에 들어간다. 256년 9월 14일 손준이 죽고 뜬금없이 [[손침]]이 뒤를 잇는데, 이에 손패파였던 여거와 손화파였던 등윤이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둘 다 죽는다. 여대도 같은 해 9월 16일에 자연사하는데, 나이가 무려 '''96세'''였다. 그리고 [[손침]]은 약 2년 뒤에 [[손휴]]의 계략에 의해 잡혀 죽고 그의 삼족이 송두리째 목이 날아갔으며, 이미 죽은 손준과 함께 호적에서 파이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리고 257년 [[제갈탄]]의 반란 때 '''전단을 포함한 출진했던 전씨 일가가 모조리 위에 투항해버린다'''. 그 후 오나라에서 전씨 일가는 풍비박산나고 얼마 안 되어 손노반도 유배당하고 더 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드디어 손패파가 깨끗이 정리된다. 나머지 이궁지쟁 생존자 중 육윤은 그 뒤로도 [[조구]]를 --좀 이상한 방법으로-- 잡거나 청렴하다고 칭찬받는 등 이런저런 공도 세워가며 잘 살다가 사망한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결말을 맞은 셈. 주적, 정밀 역시 자기 수명대로 살고 갔다. 어쨌든 이 5년간의 혼란상은 손휴가 즉위하면서 결국 정리되었다. 문제는 손휴가 오래 살았다면 오르겠는데 [[촉한]]이 멸망하자 근심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일찍 죽어버렸다는 것. 이 때 손화 본인은 이미 살해당했으나 그의 서자 1명이 황제에 오르면서 죽은지 약 11년 후에 황제가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바로 '''[[손호]]'''였다는 거다. 결과적으로 '''손호 대에 [[동오]]는 멸망한다.'''[* 손호의 다른 동생 손준(孫俊)은 장승의 외손자로 곧 손화의 적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 이 때문에 황제위에 올랐을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손호 대신에 손준이 황제위에 올랐으면 어땠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물론 손호도 즉위 전에는 평가가 좋았기에 황제에 오른것이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