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후계 선정과 숙청에 관하여 === 손권은 이궁지쟁 과정에서 기존의 대세력인 호족파가 후계에 관여하려 들자 이들을 모두 박살내 버렸다. 많이들 간과하는 지점인데 장자계승이 되면야 좋겠지만, 원래 종법상으로도 장남 이하 아들들은 상하관계가 장남과 다른 아들들에 비해서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손권 후계분쟁에서처럼 3남과 4남의 관계로 보면 이런 서열관계가 장남만큼 절대적이진 않은것이다. 즉 장남이자 태자였던 손등이 죽고 3남인 손화가 높은 건 아니고 유리하다는 것인데, 왜냐면 장남이 아니면 그 밑으론 종법에서 정해놓은 서열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효종(조선)|효종]]도 차남이라서 왕이 된 게 아니라 [[인조]]가 '장자가 아니면 차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대군들 중에 누가 나을지 추천해봐' 했는데 봉림대군이 낫다고 해서 된 거고, 선조도 [[임해군]]이 자연스럽게 아웃되고는 내심 차남 [[광해군]]이 아니라 [[신성군]]을 밀었다. 조선 태종이 장남인 [[양녕대군]]을 폐할 수 밖에 없게 되자 남은 아들들 중 그나마 나은 3남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것이나 당태종 이세민이 문제를 일으킨 장남 [[이승건]]을 폐하고 3남인 [[이치]]를 택한것도 이런 연유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전근대의 계승순서를 잘 모르고 형제관계를 단순히 나이순으로만 서열을 잡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인데 전근대 왕실에선 장남이 아니라면 택현 적용해서 순서 무시하고 픽할 수도 있었다.[* 장남, 차남이 장성하기 전에 죽었다면 삼남이 사실상 장남 취급 받긴 하지만 손화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다.] 후한의 명군 [[광무제]]가 총애하는 여인 [[음려화]]의 아들 [[한명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서 멀쩡한 황태자를 폐한 사례를 보았을 때, 후계자를 선택할 권한은 군주에게 있는 것이며 아직 성리학적인 장자우선의 원칙이 확립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괜히 조조가 조비와 조식, 심지어 이들보다 한참 어린 [[조충]]까지 고려해서 후계자를 택현한 것이 아니다. 난세에는 무조건 장자계승이 최선이 아니라 세력을 유지할 명민한 군주감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손등 같이 장자로써의 명분과 실력이 모두 뒷받침되면야 좋겠지만 손등의 요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이 항상 그렇게 좋게만 진행되리라는 법은 없다. 당장 삼국시대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서도 장자가 문제가 있음에도 유교적 장자우선의 원칙을 고수하다가 후대에 나라를 말아먹은 서진 [[진무제]]의 사례가 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이궁지쟁에서 손권이 크게 비판받는 점은 장성한 손화, 손패 다 내치고 세운게 10살도 안된 손량을 택했다는 것에 있다. 손량이 똑똑한건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을 살면서 노련한 정치력을 가진 대신들을 상대하는 건 든든한 후견인이나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정치적 안목을 타고난 게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했으며 안타깝게도 손량에겐 그런 강점들이 없었다. 실제로 삼국지 팬들 가운데서는 [[조비]]의 인성 문제의 예를 들어가며, 조조의 후계자 선정을 비판하고 [[조식]]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독 손권의 문제에 관해서만은 손권이 조조처럼 고민해가면서 난세에 후계를 본인이 택현할 수 있다는 논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손패가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궁지쟁 과정에서 뒤늦게 손패가 손권에게 보여준 사항이지, 원래는 손패 역시 그 자질로 손권에게 총애를 받을만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태자와 노왕에 대한 신하들의 상소에서도 손패의 자질을 칭찬하는 글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손화나 손패 모두 파당싸움을 하면서 아버지인 손권을 분명히 실망시킨 것 역시 사실인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선, 손권에게는 정말 이상적인 후계자였던 손등과 그를 충실히 보좌했던 손려라는 이상적인 후계구도가 있었고 누구를 데려와도 이게 성에 차지 않았을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하물며 아버지가 나중에서라도, 둘을 따로 살게하여 대우를 어느정도 분명히 했음에도 한쪽은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신하와 편을 먹어 아버지를 염탐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편을 들지 않는 신하들을 모함하는 짓을 했으니 손권 입장에서 얼마나 이들에게 실망했을지 보이는 대목인 것이다. 적어도 조조의 아들인 [[조비]]와 [[조식(삼국지)|조식]]은 후계자 선정과정에서 이 정도로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실망시킨 적은 없다.[* 조식과 그 일파가 야심이 있어서 끊임없이 어필하고 조비 또한 이에 불안함을 느끼긴 했으나 조비는 결코 다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가후가 말한대로 그냥 처신만 좀 신경썼을 뿐인데 그 결과 조비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손화보다는 손패가 더 잘못을 하긴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아무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한들 정석대로라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며 거듭 자신이 제위에 관심도 없다는걸 보여야 했다. 선대의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형인 손려가 이미 보여준 케이스이다. 물론 사람이 다 그럴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총애에 기대어 '나도 한 번...'하는 심상으로 권력욕이 동하기 쉽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손패는 아버지의 총애와 친어머니의 죽음으로 불안감에 휩싸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형쪽에서 빌미를 제공했을 때 지나치게 공격한 감이 없잖아 있다. 본인이 죽게 된 것도 본인 주변인물들 탓도 있지만 손패 역시도 손화를 해치려는데 가담했고 손권도 손패에 대한 정나미도 떨어진걸 보면 역시 본인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궁지쟁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기실 따지고 보면 손권에게 지나치게 후계에 대해서 간섭과 비판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당장 태자파와 노왕파의 당쟁때 피해를 입은 자들을 보면 태자파는 주로 본인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노왕파는 노왕 중심 측근들이 주로 피해를 봤다. 즉 손권에게 찍히지 않으려면 이 싸움을 손권이 극혐하는 후계자 간섭 및 조정내 파당 싸움이 아니라 태자vs노왕 근신들과 문객들의 싸움으로 둬야 한다는걸 노왕파가 잘 알았고 그래서 잘 살아남은 것이다. 대놓고 손권에게 대들었던 육손과 달리 [[전종]]이 비교적 처신을 조용히 했고 손화파를 공격할때도 후계 문제가 아니라 논공행상 과정에서의 문제를 두고 공격한 것을 생각해보자. 태자파 가운데서도 그렇게 처신한 사람들은 알아서 잘 살아남았다. 처음에 좀 나대다가 손권이 대놓고 눈치주니까 깨갱거리며 손패에게 붙었던 아들 [[제갈작]]을 죽이고 물러난 [[제갈각]]이나 아예 태자파에 조용히 묻어간 [[등윤]] 같은 사람들은 알아서 나중에 보정대신 자리에 올랐단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문서 서두에도 쓰여 있지만 이궁지쟁 시점에서 손권은 이미 고령이었고 후계를 생각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이 시기에 본인의 권력욕 때문에 신하를 대거 갈아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시기에 신하를 대규모 숙청하는 것은 권신이 될 우려가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고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인데, 왜 후계자까지 갈아버렸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