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배경 == 이 모든 문제는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손권의 아들들이 일찍 죽은 비극]]'''에서 시작됐다. 차남 [[손려#s-1|손려]]가 232년에 고작 20세로 요절한 것도 모자라 241년에는 장래를 촉망받던 태자 [[손등#s-2]]이 33세의 나이로 죽는다. 손권은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는데, 이때 사남 [[손패]]를 같은 궁궐에 살게 했는데 이때부터 오나라의 신하들은 예법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는다며 손권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아들끼리 [[평등]]하게 대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일 뿐,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는 후계자인 아들과 그렇지 않은 아들의 관계를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나아가 현대도 아니고 고대 군주제 국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황태자와 다른 황자들은 사적으로는 형제이지만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관계라 할 수 있다. [[이등체강]] 원칙이 군왕이 아니라 친왕으로 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조직에서 후계자와 그렇지 않은 이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건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하라는 신호로 여겨질 공산이 컸다. [[가후]]가 괜히 [[원소(삼국지)|원소]]와 [[유표]]의 사례를 들며 후계자로 정통성있는 장자인 [[조비]]를 민 것이 아니다. 사실 조비의 경우도 조식의 존재 때문에 꽤 부작용이 심한 사례였다. [[촉한]]의 경우 [[유선(삼국지)|유선]]은 [[유비]]의 첩이었던 감부인 소생이고 이후 유비가 오의의 여동생을 정식 황후로 맞이했기 때문에 원래는 분쟁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지만, 나중에 [[감부인]]을 정식 황후로 승격시키고 유선을 위해 유비의 양자 유봉을 미리 숙청한데다[* 사실 유비는 유봉을 숙청할 생각은 없었다. 위나라 루트 거점인 상용을 맹달,신의,신탐 형제와의 불화로 상실, 거기에 관우를 구원하지 못해 유비가 '''아끼던 관우가 사망'''하는 원인 제공까지 있어 제위 문제가 아니라 법치적 문제로 형을 집행한 것에 가깝다.] 유비와 제갈량이 모든 권위를 유선에게 몰아줬기 때문에 촉한이 망할 때까지 왕족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유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고 숙청당한 왕족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유선이 장남이었다. 즉 다른 자식들은 유선보다도 어렸다. 이후 촉의 권력은 고명대신 [[제갈량]]에게 집중되었으나 제갈량은 왕권에 도전하려 들지 않고 국가 발전을 위해 크게 힘썼으며, 다른 신하들 또한 이에 충성했으며 최소한 반발하지는 않았다. 내부 사정이 이 정도로 굉장하게 좋았음에도 정작 [[유선(삼국지)|그 후계자라는 인물]]의 역량이 부족하다보니 다 말아먹긴 했지만 적어도 후계자 문제로 시끄러워지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신하들의 반대로 다른 궁궐에 살게 되나, 오히려 이때부터 오나라는 신하들이 두 파로 분리되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니 이를 '''이궁지쟁'''이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