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궁지쟁 (문단 편집) === 결과: 숙청의 결과와 이후의 황제들 === 이렇게 숙청당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호족이므로 손권이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장작 손량을 지지해줄 [[반부인|모후]]도 즉위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문제가 꼬여 버렸다. 이 때문에 손량 본인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다가 손권이 내세운 보정대신들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들로 다들 폐사해 버리면서 오나라 정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손휴는 손침이 꼭두각시로 만들 요량으로 즉위시켰으나 즉위 2개월만에 손침을 잡고 혼란을 잠재우는데, 이는 손휴가 워낙 유능했기 때문이고 일반적으로는 이대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손침같은 놈에게 정권을 넘어가게 만든 보정들을 세운 손권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다. 너무 결과론적이고 손침 같은 놈이 어디서 튀어나올줄 알았겠느냐는 변명 정도는 해줄 수 있겠다. 다만 이궁지쟁은 무슨 분견대에서부터 300여명이 넘는 인재를 잃어버린 유비의 [[이릉대전]] 마냥 인재를 완전히 고갈시킨 것도 아니었다. 손권의 이궁지쟁은 몇몇 신하들의 일족이 몰살되는 일은 있었으되 근본적으로 핵심인원들이 피해를 입은건 사서에도 나오듯이 수십여명에 불과한 편이고 모든 신하들을 죽인것도 아니라 일부는 유배, 일부는 처형이라는 형태로 숙청이 이루어졌다. 국내에서는 처음 정사가 소개될때 손권의 실책을 두고 이릉대전과 비교해서 유비만이 아니라 손권도 크게 실책을 했다는 식으로 손권을 깎아내리면서 평가를 한 감이 있는데 중국 본토의 [[바이두 백과]] 같은 곳에선 제갈근, 고옹 같은 1세대 죽고 2세대 신진세력들이 왕자들에게 붙어서 한자리 하려고 당파 조장했다가 손권에게 벼락 맞았다는 식으로 묘사하며 이궁지쟁 숙청 자체도 육손이 죽은 245년 경으로 한정하고 이후에는 조정이 정상복귀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식으로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의 정치적 갈등과 분란으로 보지 한때 오나라 비판자들의 손권을 조롱하기 위해 과장한 바처럼 피의 대숙청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https://baike.baidu.com/item/%E4%BA%8C%E5%AE%AB%E4%B9%8B%E4%BA%89/8782701?|#]] 사실 이궁지쟁은 생각만큼 오나라 전반적으로 봤을땐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궁지쟁은 오나라 내부에서 상위층 몇명만 날아간 사건이지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사건이 결코 아니다. 당시 외정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특히 246년에는 [[주연(삼국지)|주연]]이 조중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동흥제 전투]] 역시 이궁지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손권이 죽은 직후 벌어졌는데 오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당시 오나라는 [[징저우|강릉]]-형남의 물자와 [[강남(중국)|강남]]의 물자를 연계시키고 한참 [[양쯔강]] 인근과 남방의 개발에 힘을 써 국력을 늘렸으며 이런 오나라의 개발은 한창 이궁지쟁이 진행되던 손권 치세 후기나 그의 사후에도 마찬가지였음이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같은 후대 학자들의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또한 이 사건 이후에 오나라 정계에 보신주의자들이 판을 쳤다는 지점에서 [[복양흥]], [[장포(손오)|장포]] 등이 [[손호]]를 황제에 올렸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나라 정계는 사실상의 시조였던 [[손책]]대부터 손씨 가문과 호족세력들이 끊임없이 긴장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손휴가 내세운 이들은 강동 외부 출신으로 근본적으로 손씨 가문과 손휴의 측근 세력으로써 기능한 이들이었기에 손휴의 명을 받들어 보신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손휴가 죽은 다음에도 일단 통치가 되는 성인이자 손씨 가문인 손호를 올려 자신들 권력의 배경인 손씨를 섬기는 역할을 맡은 것일 뿐이다. 그나마도 토착 호족들은 끊임없이 손씨 가문에 간언을 하며 황권을 견제하는데 충실했으며 육씨 가문인 [[육개]], [[육항]]이나 [[화핵]] 같은 이들도 목숨을 걸고 손호에게 간언했다는 점에서 오나라 조정의 기풍이 그런쪽으로만 흘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복양흥, 장포 같은 이들이나 [[시적]] 같은 이들도 손호를 폐할 생각을 했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는 손씨 가문이 언제든 신하들의 반기를 제압하기 위해서 오히려 지속적으로 그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좌로 봐야 할 것이다. 나름대로 역량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손침의 부상으로 통치에 실패한 손량 다음의 황제인 손휴, 그리고 손휴 다음에 제위를 이은 손호는 모두 즉위 당시 나이가 20대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였고 또 그리하였다. 심지어 손휴는 즉위 당해에 손침을 제거하기도 했으니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했고 손호도 폭군이라 문제지 나름 똑똑했다는 평도 있고 실제로도 요절하지 않은 채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16년간 제위한걸 보면 자리도 못 지킬 정도로 멍청한건 아니다. 그나마 손호 시기에는 간신들이 많기는 했어도 이들도 결국 손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고 이들 중에서는 손호에게 죽은 이들도 많았다. 이후의 황제들이 초대 황제인 손권만한 역량이 없어서 그렇지 무조건 무능한 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따라서 이궁지쟁으로 무조건 오나라가 망조에 들었다는 시각도 과한 면이 있다. [[오멸망전]]도 근본적으로는 손호대까지 남아있던 [[육항]]을 비롯한 수뇌부의 유능한 인재들이 손호 치세 후기인 270년대 중후반에 소실된 사이 세대교체에 실패해 오나라가 서진의 물량에 밀린 것이지. 열세인 상황에서도 [[교주]]를 두고 [[서진]]과 마지막까지 힘겨루기를 할만큼 오나라의 역량은 후기에도 그렇게 간단하게 금방 소진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