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근배 (문단 편집) == 생애 == [[1940년]][* 본래 1939년생이나, 호적에 이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3월 1일]], [[충청남도]] [[당진시|당진군]](현 [[당진시]]) [[송산면(당진)|송산면]] 사월리 209번지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699|이선준]](李銑濬)과 어머니 장순의(張順儀)[* 장후재(張厚載)의 셋째 딸이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각현(李覺鉉)은 한학자로 당진 지역 유도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이선준이 [[8.15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92|활동하다가]] 국민학교 5학년 되던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이후 줄곧 조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후 [[당진정보고등학교|당진상업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의 전신. 과거 [[서울대학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 문맥을 자랑한다.]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아버지가 보던 일본책 여백에 펜촉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프랑스의 18세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읽고 자신이 먼저 그런 소설을 써야 했다는 생각에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도망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집안에서는 [[공주사범대학]](현 [[국립공주대학교/학부/사범대학|공주대학교 사범대학]])를 가길 원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선생이나 공무원이면 당시 어른들이 바라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어쩐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근배는 선생이 되긴 싫었고 그는 신문에서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자기가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장학생이 되면 보내달라고 그의 조부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을류 장학생[* 갑류는 전액 장학생이고 을류 장학생은 반액만 내주는 장학생.]이 되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8학번으로 진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김동리]]에게서 소설을, [[서정주]]에게서 시를 사사했다. 1960년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출간한 이후에,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문학)|시조]] <묘비명>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벽>과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압록강>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이근배 시인의 서라벌예대 재학 시절 시 창작 강의를 하던 [[박목월]]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 장소에서 “오 바로 너였구나. 어쩐지 시어가 참 곱고 신선해서 네가 아닌가 했었다.”라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보신각종>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달맞이꽃>가 당선되었으며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북위선>기 당선됨으로써 문단 최초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5개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