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기영(소설가) (문단 편집) == 생애 == [[1895년]] [[5월 29일]] [[충청남도]] 온양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아버지 이민창(李敏彰, 1873 ~ 1919)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 朴氏, ? ~ ?) 부부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에 천안군 천안읍 안서리를 거쳐 북일면 중암리로 이사하였고 서당에 다니며 《[[진서]](晉書)》를 공부했다. [[1910년]]에 사립 영진학교(현 천안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현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에서 유학하였고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1924년]]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잡지)|개벽]]》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25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는 등 조직과 창작 양면에 걸쳐 맹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가난 체험을 당대 현실의 총체성과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특히 집단성의 묘사에서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성과를 산출해 냄으로써 당대 프로문단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받았다. 《농부 정도룡》, 《민촌(民村)》, 《홍수》, 《서화(鼠火)》 등에서는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농촌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내적인 성숙과정을 거쳐 종합적이고도 완결하게 표출된 것이 바로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작 《[[고향(이기영)|고향]](故鄕)》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농민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창조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농촌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17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9월 30일]]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을 발족하였다. [[1946년]] [[2월]]에 [[월북]]하여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는 [[조선일보]]에 1933년 연재한 《서화》, 1933년~1934년 연재한 《고향》, 소설집에 《민촌》(192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鑛山村)》(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북한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땅》,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발표된 대하소설 《[[두만강]]》 등 다수가 있다. 이 가운데 《두만강》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른 바 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한편 이기영은 [[김정일]]과 ~~악연~~인연이 있는데, 김정일의 동거녀이자 [[김정남(북한)|김정남]]의 친모 [[성혜림]]이 바로 이기영이 북에서 둔 3남 1녀 중 장남인 리평(李平)의 전처였다. 비록 리평과 성혜림이 중매로 맺어진 탓에 사이가 소원했다한들, 졸지에 뜬 눈으로 맏며느리를 잃은 셈이다. 이기영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작가동맹위원장까지 지냈지만 며느리를 돈독한 사이였던 김일성의 아들에게 빼앗긴 충격 때문에 이후 작품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북한)|정두환]], [[진반수]], [[최철환]], [[한설야]]와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 5월, [[김창준(목사)|김창준]] 장의위원,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내다가 1984년 8월 9일 6시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북한은 정무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였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