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이기형 (문단 편집) == 국가대표 == [[파일:external/www.kfa.or.kr/201611592716.jpg]]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데뷔하여[* 당시 축구협회는 올림픽 대표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축협은 올림픽 대표팀을 타국 A대표팀과 맞붙는 대회에 참가시켜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기형은 21세의 나이에 칼스버그컵과 다이너스티컵을 소화하며 대표 선수로 첫발을 뗐다. 그중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은 화제를 모았다. 전반 26분 이우영이 코너킥을 땅볼 패스로 내줬고, 후방에서 달려들던 이기형이 골대와 약 30m 떨어진 곳에서 쭉 뻗는 슛을 날려 골망을 찢을 듯 흔들었다. 4번째 A매치에서 터진 데뷔골로 이기형의 오른발은 뭇 사람에게 알려졌다. 이기형은 이날 한 골을 더 넣어 2-2 동점을 만들었으나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놓쳤다. 1997년 9월 28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도쿄 대첩(축구)|일본과의 최종예선 3차전]]에서 멋진 크로스로 서정원의 동점골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47경기 6골로 꽤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지만 정작 A대표로서 남긴 족적은 다이너스티컵 이후 희미하다. 대회 본선마다 불참했기 때문이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붙박이 라이트백으로 뛰며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정작 본선 명단엔 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이기형은 대회를 시청하지 않았고, 이웃집의 환호성 소리도 듣기 싫어 한동안 산속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 플레이 스타일을 감안하면 한 수 위의 팀들 상대로 수비력 강화 차원에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기형 대신 발탁하려 했던 강철이나 강철이 부상으로 낙마하자 최종 발탁된 최성용은 이기형같이 폭발적인 스피드와 킥은 없지만 지구력과 경합 능력이 뛰어나 이를 바탕으로한 대인저지에 두각을 보인 선수들이었다. 최용수와 함께 월드컵 예선을 책임진 [[이상윤(축구인)|이상윤]]이 있으니 공격력 강화보단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였던걸로 보이는데 현대축구 트렌드에 깜깜했던 당시 한국은 그런 미봉책으로 보완되는 팀이 아니었고 월드컵에서 찢어발겨졌다. 2002 한일 월드컵 역시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참가할 수 있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 초창기에는 십자인대 부상에서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십자인대 부상은 원래 6개월 만에 나을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재활 훈련을 하다 무리하는 바람에 수술에 들어갔고, 그렇게 6개월씩 두 번 회복기간이 연장돼 결국 일년 반 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2004 아시안컵도 예선은 주전으로 소화했으나 [[오만 쇼크]]로 별다른 족적은 남기지 못했고, 역시 본선행엔 실패했다. 2003년 10월 네팔을 7-0으로 대파할 때 2골을 넣은 것이 이기형의 마지막 A매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