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나가와카이 (문단 편집) === 초대 이나가와 세이죠 시대 === 이나가와카이는 초기에는 이나가와구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빠른속도로 주변지역의 세력을 흡수, 성장했다. 미군정시기 아타미를 비롯한 요코하마 인근은 도쿄의 외항으로써 한국 및 중국계 사람들이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자치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이곳에서는 일본인과 이들 민족사이에서 일종의 영역싸움이 잦았는데 이나가와는 당시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츠루오카 마사지로와 협력해서 각성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세력을 확대한다. 이 시기 요코하마 주재 미국 총영사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공갈과 협박을 통한 보호금 갈취부터 외국상선에 승선하는 절도단 지휘까지 이들이 손대지 않는곳은 없다"라고 정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이나가와회의 주요 수익원은 카지노도박업으로 이 시기엔 하루만에 6000만엔가량의 수익이 생길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규모를 키워나가던 이나가와회는 결국 63년 당국의 주목이 높아지자 이름을 긴세이카이(錦政会)로 바꾸고 조직을 아예 정당으로 등록, 신청하기까지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나가와는 [[고다마 요시오]]와의 유착이 표면화 된다. 평소 정치적 욕심이 강했던 이나가와와 극우세력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고 싶었던 고다마 요시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는것을 깨닫게 되고 적극적인 협력노선을 구축하는데 때마침 [[안보투쟁]]을 계기로 [[기시 노부스케]]의 뜻에 따라 보수세력의 [[전위대]]로서 우익과 야쿠자를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현실화 된다.[* 전후 처음으로 우익과 야쿠자를 규합하여 보수세력의 첨병으로 삼으려던 구상을 하고 이를 실행하려했던 인물은 법조인 출신으로 [[요시다 시게루|요시다 내각]]에서 검사총장, 법무대신등을 지냈던 기무라 도쿠타로(木村 篤太郎)였다. 그러나 기무라의 구상은 당시 수상이던 요시다가 반대하여 무산된다. 기무라는 후술하게 될 안보투쟁에서의 야쿠자와 우익의 동원, 우익세력이 주축이 된 [[자민당]]의 외곽조직 자유민주당동지회의 결성에도 깊숙히 관여한 우익 세계의 지도적 존재였다.] 이에 따라 당시 [[자민당]] 간사장 가와시마 쇼지로를 만나 막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고다마는 이나가와를 지원해 야쿠자연합체 조직을 구성하려한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점은 고다마가 전국적인 규모의 야쿠자조직체를 만들기위한 발표를 하기 직전에 야마구치구미가 연합에서 빠져버렸다는 점에있다.[* 전국정벌작전을 벌일정도로 세확장에 열을 올렸던 야마구치 구미의 입장에서는 염원의 도쿄진출이 전국적인 규모의 야쿠자 조직체에 참가했다간 불가능해질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것이다. 실제로 고다마가 만든 관동회는 야마구치 구미의 도쿄진출을 막는 핵심적인 장벽역할을 했고, 고다마의 의도와 별개로 실제로 여기에 참여한 조직들은 야마구치 구미의 도쿄진출을 막고자하는 목적도 상당히 컸다.] 이후 다오카 가즈오와 고다마간의 교류협력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사실상 다오카 카즈오는 고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에 속하는 다나카 세이겐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다른 야쿠자 조직들과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경향을 많이보인다. 아무튼 이 결과 탄생한게 바로 관동 7개 주요갱단이 모인 관동회다. 관동회는 이나가와 세이죠 주도로 마츠바카이의 후지타 우이치로를 수반으로 하는 거창한 극우야쿠자단체였으나 사실 내부적으로는 입장이 상당히 갈리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미요시회의 세키가미 요시미츠는 관동회를 단순한 조직간 친목협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정치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반면, 마츠바회의 후지타 우이치로는 [[https://ko.m.wikipedia.org/wiki/일본교직원조합|일본교원노조]][* 당시 일본내 우파가 즐겨 공격한 대상이었다. 지금도 일본 좌익세력의 핵심조직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막고 역사왜곡에 열렬히 반대하는 방파제역할을 하고 있다.]를 대놓고 비난하면서 각종 우익세력의 정치적 이벤트에 조직원을 동원해서 참가하곤했다. 다만 당시 경찰관계자들 중에서는 이러한 마츠바회의 깽판은 단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가리기위한 연막행위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고한다. 그러나 결국 관동회는 이런 내부적인 입장차이에 더해서 야마구치구미와의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는데 당시 고다마의 의도와는 별개로 관동회에 참가한 조직들의 상당수는 다오카의 야마구치구미가 도쿄로 진출하는것을 막고자하는 의도로 참가한 부분이 컸기때문이다. 특히 고다마는 자신과 가까웠던 [[자민당]] 당인세력의 거두 [[고노 이치로]]를[* 공교롭게 고노는 고다마와 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야마구치구미와도 유착하였는데 야마구치구미의 최대 돈줄이었던 항만하역사업의 후견인이 고노였다.] 도와준답시고 관동회의 명의로 자민당측에 파벌정치의 종식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는데 이것이 도리어 자민당 정권의 분노를 사 전후 최초의 대대적 야쿠자 검거작전인 1차 정상작전(頂上作戦)을 야기하게 되고 관동회는 타격을 입게 된다.[* 어디까지나 경고의 의미였다. 과거 일본의 국가권력, 그리고 그 정점에 있던 자민당 입장에서 야쿠자는 박멸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악]]과 이권을 매개로 한 유착, 그리고 좌익을 견제하기 위한 사냥개로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60년대 다오카는 도쿄진출의 야욕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데 실제로 이 시기 벌어진 사건이 바로 그랜드 펠리스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야마구치 구미가 관동지역으로의 진출 발판을 만들기위해 요코하마로 부하들을 보내 사무실을 만들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로인해 당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한 이나가와회와 야마구치구미가 정면충돌, 무장전투를 벌이면서 발생했다. 결국 항쟁을 중재하기위해 고다마와 이나가와가 나서게되고, 당시 도쿄를 주무대로 동성회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던 재일교포 오야붕 [[정건영]]의 [[토우세이카이]][* 당시 전국10대광역폭력단으로 지정되었던 도쿄 [[긴자]]를 중심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조직. 덧붙여 코다마 요시오 와 이나가와 세이죠가 파트너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면 정건영은 코다마의 오른팔 격이었다.]를 정책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사카즈키고토|교다이 사카즈키]][* 타오카가 형 정건영이 동생이 되는 6:4 사카즈키. 정건영의 동성회는 전후 미군정의 비호아래 급격한 성장을 해 관동에서 기존 야쿠자들에게 눈에 가시로 여기지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에 야마구치구미라는 거대세력을 배경으로 두고싶은 열망이 있었다.]를 맺게하고 이를 명목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그 이상 관동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중재안이 제시된다. 이나가와는 비록 제한조건이 있었지만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간접적인 형태로 관동진출을 확대해나가는것을 허용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관동회는 그 의미를 잃고 해산하고만다. 다만 타오카는 이런 제한 조건을 우회하기위해 이런저런 꼼수를 발휘하는데 대표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인 다나카 세이겐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마약유통근절동맹이라는 형식상의 기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관동지역에 동맹자들을 늘린것이다. 실제로 이때 릿쿄대학의 마츠시다 마사토시 총장 등 사회적 유명인사가 이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결국 야마구치구미의 꼼수는 묘한 형태로 결국 대성공으로 이어지는데, 동성회 회원 키노시타 하루오가 타나카 세이겐과 다오카 카즈오의 이 운동이 야마구치 구미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되었지만 동성회입장에서는 오히려 조직이 고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다나카 세이겐을 저격하는 사건을 벌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건영은 책임을 지고 동성회가 야마구치구미산하 직계단체가 되는 선택을 내림에따라 야마구치구미는 확고하게 도쿄에 자리잡게된다. 다만 관동회의 해산과는 별개로 이나가와 세이죠는 지속적으로 관동지역 조직들의 친목모임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결과로 등장한것이 관동회를 승계한 관동이십일회 다.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매년 2월 관동지역의 거대 조직간부들이 모이는 합동식사회로 계속 이어졌으며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야마구치구미에대한 견제 및 세력갈등 조율의 목적이 컸다. 1965년에는 조직명을 이나가와잇가로 바꾸고 1972년에는 이나가와카이로 확정한다. 이를 기념해서 위의 노래인 이나가와 동지회의 노래를 만들었다. 1985년 이나가와 세이죠는 총재로 물러난 뒤 회장 자리는 이시이 스스무에게 물려주었다. 같은해 다케나카 마사히사 야마구치구미 4대째 두목의 후견인으로 취임했다. 이나가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와의 직접적인 갈등 이후로는 주로 야쿠자세계에서의 정치적 중재자로서의 위치로 활약하는데 이는 이나가와 세이죠가 타오카 카즈오의 뒤를 잇는 야쿠자세계에서의 2인자로서의 영향력을 가지는 결과로 이어지게된다. 실제로 다오카 가즈오 사후 야미구치구미 4대 두목으로 타케나카 마사히사가 결정될 때 타케나가의 후견인이 되주었고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역시 두목 승계 당시 이나가와 세이죠를 후견인으로 모셨다. 특히 와타나베가 이치와카이와 내분중이던 야마구치구미의 5대 두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와타나베의 항쟁 중재 제안을 이나가와 세이죠가 적극적으로 받아준 결과이기도하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야쿠자세계의 정치적 중재자이자 언론플레이의 달인이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 세이쵸는 고다마 요시오의 관동계열 조직들의 핵심인 관동회를 주도 하기도 했으며 관동계조직들이 관서의 핵심인 야마구치구미와 평화협정을 맺는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이나가와카이 자체는 조직원 수 4000여명 규모에 수익수준도 야마구치구미나 스미요시회와 비교했을때 상당히 뒤떨어지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쿠자세계에서는 야마구치구미 바로 다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카이는 전국에서 세손가락에는 들어갈정도는 되었지만 실제 발휘되는 영향력에 비해 규모가 야미구치구미 절반에도 못미치는 편이었다. 규모면에서 이나가와카이보다 조금 더 큰 스미요시회는 규모에 비해 연합이라는 특성때문인지 오히려 관심을 덜 받는 조직이었다. 이는 세이죠라는 인물의 정치적, 전략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매년 경시청에 대놓고 신년인사를 나가거나 종종 하위조직 두목들을 불러들여 만찬을 열었으며 틈틈이 여행을 하면서 돈을 마구 뿌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도모하는걸 상당히 중시했는데 실제로 세이죠의 인터뷰 자료나 증언들을 보면 세이죠 자체는 상당한 노신사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썩어도 야쿠자라고 이 사람도 엄청난 수라장을 거쳐온 사람이다. 싸움으로 귀 일부도 없었고 가슴 한복판엔 칼자국이 나있는데다가 심지어 뒷통수에 칼을 맞아 뇌 일부가 날아갔다가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다. 그러고도 90살넘게 산 괴물. 즉 젊었을때는 수라장을 거쳤고 나이들고 나서는 능구렁이가 다 된 노괴다. 2006년 츠노다 요시오의 취임식에 참석하여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주도한 이나가와카이의 분열을 막았다. 2007년경 이나가와 세이죠는 폐렴으로 사망한다. 장례식에는 전국의 야쿠자 거물들이 모두 찾아왔다.[[https://www.youtube.com/watch?v=adPcKzbzRHQ|영상]] 이나가와 세이죠는 전통적인 야쿠자 이미지에 대한 매니아로 실제로 각종 야쿠자 영화촬영에 많은 돈을 지원해댔으며 한편으로는 야쿠자집단내에서는 특이하게 화려해진 문화를 없애려고 노력한 인물이기도하다. 실제로 그는 평소에 야쿠자조직 특유의 단지문화를 꺼리기도 했고 사카즈키의식과 데무카이의식[* 야쿠자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걸 축하하는 의식으로 조직의 힘을 과시하기위한 목적으로 거대 야쿠자 조직들은 차량과 사람을 대거동원하곤 한다.]의 간소화를 추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이나가와회는 세이죠가 있을때는 데무카이 의식이 없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