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낙연/생애 (문단 편집) == [[동아일보]] 기자 == [[파일:이낙연 동아일보.jpg]]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2000년 정계로 진출할 때까지 21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여담으로 [[이동관]]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둘의 본관이 같다.] 동아일보 입사한 다음해인 1980년 [[미술교사]]인 김숙희 여사[* [[전주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강동구 [[명일여자고등학교]]에 재직했다.]와 선을 보고 결혼했다. 아내는 이후 이낙연이 일본특파원으로 파견 나갈 때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입사 이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국제부장을 지냈다. 1989년부터 수년간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바로 이 시기쯤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의 방일에 반발하여 발생한 [[적보대 사건]](아사히신문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어]]를 준 네이티브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국무총리 인사청문회(2017년)에서 동아일보 기자 시절 [[전두환]] 홍보성 칼럼을 작성했다는 지적에 대해 이낙연은 "떳떳하지 않고 부끄럽다"고 답했다. 다만 기자 시절 전두환을 두고 '위대한 영도자'라고 한 부분은 단순한 발언 인용으로, 본인의 책임은 아니었다.[[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1071817240000120|#]]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옛 민주당을 출입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알게 되어 친분을 쌓게 되었고, 결국 정치권에 입문하게 됐다. 198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호남 지역구를 공천해 줄 테니 정계에 입문하라고 적극 권유했다. 하지만 당시 도쿄 특파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이낙연은 김대중 총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를 거절했다. 당시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밀입북하여 [[김일성]], [[허담]] 등 북한 정권 수뇌부와 만났고, 김일성으로부터 5만 불의 공작금을 지원받았다는 충격적인 사건(국회의원 밀입북 사태/서경원 의원 고정간첩 사건)이 터지면서 평민당이 큰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낙연은 이때 출마 권유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나는 국회의원보다 도쿄 특파원이 더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도쿄, 워싱턴 등 주요 선진국 특파원은 예나 지금이나 기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요직]]에 해당하며,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 일본 도쿄는 [[버블 시대]]의 정점에서 세계 최고의 풍요를 자랑하던 도시였다. 기자로서의 커리어패스를 지속할 생각이 있을 때 도쿄 특파원과 야당 의원을 비교하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전자를 선택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기자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낙연 당시 기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기자회견을 할 일이 있었고, 타 신문사 기자들은 다 모였는데 이낙연 기자가 보이질 않자 시작을 안 하다가, 이낙연 기자가 조금 늦게 도착하니 그제서야 기자회견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으로 김대중은 지하 서재에 있기만 하면 무조건 인터뷰에 응해줬다고 한다.] 그 외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낙연 기자와 식사 중 자기 그릇에 있던 고기덩이를 이낙연에게 건내준 일화,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과 아예 다른 얘기를 해준 일화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이낙연 본인도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단연 김대중으로 꼽는다.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중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