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대용 (문단 편집) === 군인 경력 === 아래 글의 출처 [* 조상현, "이대용 장군 일기와 한국현대사", 인문학술 제9호(2022. 11), pp. 88-91] [[한국 전쟁]] 당시 육군 제6보병사단에서 장교로 [[춘천-홍천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7기로 군문에 들어와 1950년 6.25전쟁시 중대장,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6.25전쟁시 이대용 장군이 참전한 주요 전투의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50년 6월 25일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서 춘천북방에서 정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을 격퇴시키고, 서쪽 5번 도로 축선을 따라 춘천방향으로 진격하는 적군에 대해서는 기관총 원거리 사격 및 박격포 사격을 가해 적의 전진을 와해시켰다. 6월 26일에는 점령한 진지에서 옥산포를 향해 파쇄공격을 감행, 공격준비 중인 적을 측방에서 공격해 적의 공격 기도를 분쇄하고 적 자주포 2대를 노획했다. 이후 27일 아침 내다리 여울을 건너오던 북한군 병력을 57밀리 대전차 2문과 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약 1개 중대의 적을 섬멸하여 춘천 조기 점령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1950년 7월 2일 신림고개 전투시 적 장갑차 1대를 파괴하고 3대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적의 남하를 저지시켜 철수하는 국군 제8사단 21연대를 엄호해 아군의 지연작전에 기여했다. 7월 5일 음성지구전투시에는 적 1개 중대를 집중 공격해 적 40여명을 사살하는데 기여했으나 교전 중 중상을 입어 제5육군병원에 후송되기도 했다. 8월 24일 전장으로 복귀해 중대장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1950년 8월 30일 화산지구전투에 참전해서 야간 공격에서 화산성 북단고지를 기습 공격해 적 1개 대대를 격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격으로 인해 적은 공격기세가 꺾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대용 중대의 야간공격은 6.25전쟁 기간 중 실시된 소총중대 규모의 야간 기습공격 중에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1950년 10월 5일 화천전투시 북한군 26여단을 기습공격 해 적 여단을 붕괴시키고 이어서 다음날 북한 지역이었던 화천읍을 점령했다. 이 전투시 이대용은 짙은 안개를 이용해 중대 병력을 이끌고 적군 여단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심장부를 기습 공격해 북한군 26여단장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를 탈환했다. 그곳의 병력을 사살하고 일부는 포로로 획득했으며 아군의 성공으로 인접해 있던 적 여단 병력들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대부분의 병력들은 화천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후 화천 점령 후 본격적인 북진작전을 전개해서 검불랑, 성천 전투를 거쳐 1950년 10월 22일 청천강에서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기도 했다. 계속 북진한 이대용 중대는 초산을 방어하던 오백룡의 여단을 격파하고 압록강으로 진격하여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나루터인 신도장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신도장에 도착, 북진작전을 완료한 이대용 대위는 중공군이 후방을 차단함에 따라 부득이하게 철수했다. 10월 30일 자정 초산군 장풍면에서 중공군 사단 공격을 받아 7연대가 붕괴되고 이대용 대위는 잔여 중대원을 인솔하여 280㎞의 철수로에서 단 6번의 식사와 13회의 전투를 거듭하며 적진을 돌파해 아군지역으로 복귀했다. 특히 건제를 유지한 채, 군복을 착용하고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이는 붕괴된 7연대에서 최초로 생환한 부대였다. 이후 38선 부근에서 교착전이 이루어질 때, 전선 곳곳에서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에는 대대 작전과장, 참모 등을 역임했고, 이후 대대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대용 중령은 1955년 육군대학 학생으로 입교했다. 육군대학을 졸업후 교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1958년 미 태평양지구 합동참모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을 1960년에 졸업했다. 6.25전쟁에서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참전해 수많은 전투경험을 했고, 선진국의 군사교육을 접한 이대용 중령은 군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한 군에서는 진급운동과 상납을 하지 않으면 진급에 선발되지 않았다. 이대용 중령은 대령진급에서 몇 차례 누락되었다. 가까스로 대령을 단 것이 1961년이었다. 이대용 대령은 제23연대장으로 보직되어 연대장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연대장들은 부대의 공금을 유용하고 장병들의 급식을 횡령해 그 돈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상관들에게 상납을 하는 등 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이대용 대령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장우주 장군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이대용 대령은 연대장 시절 나의 부하였는데, 그는 공금을 1원도 손대지 않는 깨끗함이 있었고, 연대 장병들에게 정량대로 급식하고 잘 훈련시켰다.” 연대장을 마치고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약 3년간 무관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변변한 보직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장군진급심사에서 3차례나 낙방했다. 이대용 대령은 1967년 10월 전역지원서 제출했다.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한국철강주식회사에서 베트남에 사업을 확장하는데, 책임자로 임명하겠다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11월 이대용 대령은 마지막 장군진급심사에서 장군으로 선발되었다. 1968년 1월 장군으로 진급한 이대용은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정무담당공사로 파견되었다. 1972년 정무담당공사를 마치고 귀국한 이대용 장군에게 육군은 보직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9월 제6관구 부사령관으로 보직을 받았다. 관구사령부 부사령관은 그야말로 한직이었다. 전역을 앞둔 장군들이 가는 자리였다. 이대용 장군도 이제 서서히 군 생활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마무리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당시 국방장관 유재흥으로부터 베트남주재 한국대사관 부대사로 임명한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