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덕형 (문단 편집) == 기타 == *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이덕형의 [[외모]]에 관해 다소 와전된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 예를 들면 "이덕형의 외모가 뛰어나서 조정에 나갈 때 [[태양]]이 두 개가 뜬다고 말할 정도였다더라"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은 전부 근래에 창작된 이야기다. 일단 이덕형의 외모에 관한 기록이 [[정사(역사)|정사]]에는 전혀 없고 태양에 빗댄 부분도 말이 안 되는데 당시 태양에 비유될 수 있는건 오직 왕뿐이었으며 왕 이외에 태양에 빗댄다는건 반역하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당대에 이덕형의 외모가 뛰어났다고 받아들여졌다는 일화는 [[정약용]]이 이덕형의 초상화를 보고 쓴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60A_0120_060_0020|감상문]]에서 이덕형의 얼굴을 아름답다([[媺]])고 한 것, 후대의 관료가 이덕형의 초상화를 보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이덕형의 모습을 중국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하나인 [[둥팅호|동정]]추월(洞庭秋月), 즉 호수를 비추는 가을 [[달]]이라는 어구에 비유했다고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H&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1432A_0300_010_1020|언급]]한 것 정도가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태양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와전된 것 같다. 또한 정약용에 따르면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체구까지 컸다고 하니 눈에 띄는 겉모습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나라 사람들이 유달리 이덕형을 잘 기억하고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조선의 초상화는 터럭 하나만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고 할만큼 실제 인물에 충실하게 그리기도 했고. * [[이항복]]과 더불어 조선 [[왕조]] 사상 아마도 최강의 [[개그]] 콤비인 [[오성과 한음]]의 1명. 한음은 그의 호이다. 다만 오성은 이항복의 호가 아닌 '오성 부원군'이라는 작위의 이름에서 따온 것. 실제 이항복의 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백사(白沙)이다. 이항복과는 평생의 우정과 둘이서 같이 남긴 장난기어린 코믹 [[에피소드]]로 유명하여 평생을 같이한 유쾌한 [[친구]]로서 어린이 동화집의 단골 소재이나 사실은 이항복보다 5살 어리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친분 관계라든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 있기는 하나 이는 두 사람 모두가 성인이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두 사람은 반말하는 사이가 아니었고, 이항복과 이덕형이 만난건 과거 시험장에서[* 다만 두 사람이 치른 과거는 달랐는데 시험장만 같았던 것이다. 이항복은 성균관 유생만 치를 수 있는 과거 시험인 알성시를 치렀고 이덕형은 성균관 유생이 아니었고 3년에 1번 치러지는 정기 과거가 아닌 왕이 원하는 해에(혹은 관리가 부족한 해) 치르는 별시를 치렀다. 당시 이항복 25세, 이덕형 20세에 시험을 봐서 이항복이 병과, 이덕형이 을과로 급제한다.]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났다는 것은 [[야사(역사)|야사]]라는 이야기인데 둘이 하도 친하게 지내다보니 이런 야사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깐깐했지만 이항복에게는 찡찡대는 성격이 강했는데 편지에 이항복을 형이라 부르며 "나 몸이 아파요", "지난번에 임금께 올린 상소는 좀 아니었어요", "형도 내 마음 몰라!", "이 사람 관직 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걸로 보아 친하기는 친했던듯 하다.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갈 때 서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배웅했다. 이들을 소재로 한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도 유명하다. * 평소에는 사람이 멍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인지 박수동 화백의 만화 <오성과 한음>에서도 오성은 키가 작고 잔꾀에 능한 제리 스타일로 나오는데 한음은 키가 약간 크고 당하는 역할을 많이 맡는 멀대 스타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최후의 일격은 한음이 주로 먹인다.] 일을 처리할 때는 빛이 날 정도로 빠르고 꼼꼼했다고 한다. 이항복이 평소 '나댄다' 싶을 정도로 분방한 인물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이리저리 눈치보고 다닌데 비해 이덕형은 평소에는 온화했으나 원칙에 충실하여 서슴없이 직언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공신첩 사양으로 임진왜란 직후 [[선조(조선)|선조]]에 의해 공신 직첩이 여기저기 남발되자 자신에게 주어진 [[공신]] 직첩(호성 공신, 선무 공신 모두에 추천되었다)을 부끄러워서 못 받겠다고 고사했다. 보다 정확히는 호성 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군|의주]]로 모시고 피난한 공을 치하한 것인데 이덕형은 다른 일도 아니고 [[일본]] 및 명나라와의 외교 교섭 문제 때문에 선조의 곁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이 때문에 본인은 임금을 충분히 모시지 못했다고 끝까지 공신 책봉을 사양한 것. 한편으로 보면 이덕형 같이 진짜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고사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어필인 셈. 이항복 역시 같은 이유로 공신직을 사양했으나 선조의 눈물어린 호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에게는 1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다고 깠다.]와 장인이자 선무 공신이 된 [[권율]] 등과의 관계 때문에 1등 공신 책봉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공신 책봉과 관련하여 논하기를 이항복은 합당하고 이덕형은 분통하고 [[류영경]]은 비루하다 하였다. * 북인을 이끌던 [[이산해]]의 사위이자 이후 [[북인]]이 갈라져 생긴 대북의 영수 [[이이첨]]이 그의 10촌 형제임에도 그는 남인으로 남았으나 당색이 강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의 절친 이항복이 분류하면 서인이기도 했고. * 재치가 부족하고 사려가 지나쳐 이런저런 일로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샀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일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런 경우에는 주로 이항복이 나서서 해명해주고는 했다. 일화 중에 하나로 그가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할 때 그가 이산해의 [[사위]]란 것을 알고 같은 이씨끼리 [[혼인]]하다니 금수만도 못한 자[* 당연히 이덕형과 이산해의 집안은 [[본관]]이 달라서 [[동성동본]] [[금혼]]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관]]이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의 [[장군]]으로서는 [[조선]]의 관례를 모르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동래 부사 [[송상현]]의 첩은 이씨라는 이유로 조선 [[왕족]]으로 오인받았다. 이덕형의 부인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나다가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피난민 무리 사이에서 떠돈 헛소문이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그녀에게 정려를 내렸으며 이덕형은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후 본처를 두지 않은 것은 한산 이씨를 유일한 본처로 여김으로 한산 이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도리와 예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라 여겨 박대할 때 해명하지 못하고 앓고 있었다. 이를 본 이항복이 이여송에게 원래 이덕형은 [[김(성씨)|김씨]] 성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임금이 국성인 [[이(성씨)|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덕형이 되었다고 적당히 둘러대서 무마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여송은 [[국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오해하여 박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후 이덕형에게 예를 갖추어 대했다. * 다른 야사로 [[첩]]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후 복구 등으로 자택에서 출퇴근하기 곤란할 정도로 바빠지자 [[궁]] 근처의 집에 첩을 데려다 놓고 [[음식]]을 차리도록 했다. 하루는 몹시 더운 날 이덕형이 첩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덕형이 미처 부탁도 하기 전에 첩이 음료수인 [[제호탕]]을 내왔다. 그 모습을 본 이덕형이 "더이상 첩으로 두지 않을 테니 본가로 돌아가시오."라며 쫓아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첩은 이항복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항복도 평소 이덕형이 그 첩을 아꼈던 것을 알고 있어서 의아해하며 이덕형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이덕형은 "그녀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운 날 미처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제호탕을 내온 것은 참으로 총명하고 [[사랑]]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시국이 어려운 때에 [[재상]]인 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가는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라 여겨 단호하게 내쫓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