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도메네오 (문단 편집) == 작곡과 초연 == 모차르트 생애 항목에도 있지만 이도메네오가 작곡된 1780년은 모차르트와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불화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모차르트는 백방으로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다녔지만 이미 유럽 전역에 모차르트가 자기 고용주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새 직장을 구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좌절의 연속을 겪고 있던 1780년 10월, 모차르트는 뮌헨으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주문받게 된다 모차르트는 이미 5년 전에 뮌헨의 전임 선제후였던 막시밀리안 3세(Maximilian III)를 위해 오페라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를 작곡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었다. 물론 취직 요청은 거절당했지만. 막시밀리안 3세가 1777년 사망한 후 후임 선제후로 즉위한 그의 사촌형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1724-1799)는 1781년 1월에 있을 사육제 시즌에 공연할 오페라를 주문하였고, 이 때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모차르트가 작곡가로 낙점된 것. 잘츠부르크에 있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요청과 함께 대본 작가이자 뮌헨의 궁정작가였던 지안바티스타 바레스코(Gianbattista Varesco, 1735-1805)가 쓴 이도메네오의 대본을 넘겨받았다. 이 이도메네오는 바레스코 본인이 직접 창작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앙드레 캉프라(Andre Campra, 1660-1744)의 비극 오페라 이도메네(Idomenee, 1712 초연)에 사용된 대본[* 이 대본은 앙투앙 당셰(Antoine Danchet, 1671-1748)라는 작가가 작성했다.] 을 이탈리아어로 각색한 것으로, 원작은 비극이었지만 바레스코는 등장인물을 좀더 줄이고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원작의 프랑스적인 분위기에 더해 자신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오페라 세리아 대본작가였던 피에트로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 1698-1782)의 스타일을 덧붙여 놓았다. 모처럼 오페라 작곡의뢰를 받은 모차르트는 이 기회에 명작을 써보겠다는 의욕이 넘쳤고, 일단 잘츠부르크에서 대강의 스케치를 완성한 후 12월에 아예 장기 휴가를 얻어서 직접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선 대본의 작자인 바레스코가 문제였는데, 모차르트는 대본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니 고쳐야 된다고 지적했지만 바레스코는 새파랗게 어린 작곡가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레스코에 대해 '음악 공연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혹시나 오페라가 엎어질까봐 두려우니 작가랑 너무 부딪치지 말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라고 타이르고 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바레스코의 대본에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 2막에서 일단 퇴장했던 이도메네오가 이유없이 다음 장면에서 버젓이 나타나서 아리아를 부른다든가, 3막 막판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던 군중들이 엘렉트라와 이다만테가 아리아를 부를 때 다들 퇴장했다가 아리아가 끝난 후 다시 환호성을 지르면서 들어온다든가 하는 식의 괴상한 무대연출이 많이 있었는데,[* 이는 당대의 오페라관행에 따른 것이다. 당시의 오페라는 스토리의 개연성보다는 볼거리 제공과 가수들이 무대에서 돋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식으로 이 심각한 오페라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또한 모차르트는 너무 대사가 길거나 관객이 지루할 소지가 있는 장면도 대폭 축소를 요구했다. 예를 들어 1막의 이도메네오와 이다만테의 만남이나 2막의 이도메네오와 아르바체의 대화에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반복된다는 이유로 대사를 대폭 축소하려고 했고 3막의 넵튠의 목소리 장면도 볼거리 치고는 너무 비중이 높다고 지적하면서 한 번 보여주고 지나가는 수준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물론 모차르트의 이런 요구에 대해 바레스코는 상당히 반발했는데, 결국 모차르트는 작가와 합의가 안된 사항은 그냥 해당 부분을 빼버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전술한 3막의 마지막 부분의 연출에 대해 바레스코와 합의가 되지 않자 29곡 엘레트라의 아리아 D'Oreste, d'Aiace(오레스테스! 아이아스!)와 30곡 이도메네오의 아리아 Torna la pace al core(우리의 중심에 평화가 찾아왔도다)를 그냥 빼버렸다. 대본도 문제였지만 가수들의 돼먹지 않은 태도 역시 모차르트를 크게 애먹였다. 특히 주인공급의 배역을 맡았던 테너 안톤 라프(Anton Raaff, 이도메네오 역)와 카스트라토 가수 빈센초 델 프라토(Vincenzo del Prato, 이다만테역)가 문제였는데, 이들은 되도 않는 자부심에 가득차서 작곡가의 말을 지지리도 안들었다. 안톤 라프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타의식을 버리지 못한 탓에 이도메네오가 주인공인데도 역할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면서 자신은 중창에 익숙하지 않으니 단독 아리아만 부르게 해달라든가 가사가 너무 많고 발음하기가 어려운 운율을 갖고 있어서 기교를 발휘하기 어려우니 가사를 바꿔 달라든가 하면서 손자뻘인 모차르트를 부단히 괴롭혔다.[* 예를 들어 'rinvigorir' 부분을 부를 때 i가 너무 많아서 발음하기 어렵다고 투덜거렸다.] 모차르트와 동갑이었던 델 프라토도 만만찮게 진상을 부렸는데, 신참 가수라 연기나 노래솜씨나 기대치에 한참 모자랐던 주제에[* 그래서 모차르트가 델 프라토에게 발성부터 일일이 가르쳐야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 항목에 있듯이 모차르트는 소시적에 보이소프라노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로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모차르트의 지시에 대해 사사건건 투덜대고 건방진 태도를 보였다. 모차르트가 얼마나 화가 났냐면 당시 부친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썩어빠진 놈을 한대 패주고 싶다고 했을 정도. 이처럼 작곡가 말을 안듣는 주변 사람들을 구슬리느라 오페라 작업은 생각보다 진척이 더뎠다. 그래도 악보 자체가 대강 완성되어 있던 탓에 1781년 1월 중순 경에는 공연이 가능할 정도로 연주자들의 훈련도 어느정도 완료되었으며 바로 뮌헨 궁정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졌다. 모차르트의 능력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던 카를 테오도르 선제후는 리허설을 보고 나서 '저 작은 머리에서 어떻게 이런 음악이 나오는 걸까?'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후 공연은 일정 문제로 잠시 지체되다가 드디어 1781년 1월 29일 뮌헨의 레지덴츠 극장에서 모차르트 본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초연때 부친 레오폴트와 누나 마리안네(난네를)를 비롯, 꽤 많은 지인들이 참석했으며 다행히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문제는 상연 일정이었는데, '행사용 작품'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던 이도메네오는 훌륭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밀려 있는 다른 오페라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초연 후 3회 정도 상연된 다음에 극장에서 내려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