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동인 (문단 편집) == 이면? == 근현대 [[친일파]] 연구의 권위자인 [[임종국(1929)|임종국]]에 따르면 이동인은 아사노 도진(朝野東仁)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근대 조선인 중 창씨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정토진종 오타니파(眞宗大谷派)의 본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정식 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 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개화승 부분도 논란이 있어서, 임종국은 이동인을 [[이중 스파이]]로 지목했다. 승려 겸 사학자 임혜봉도 그를 일본의 조선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친일파]]로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이동인이 개화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침략 밀명을 받고 [[부산]]에 처음 상륙한 [[일본]] [[불교]]의 접근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회광과 함께 구한말 ~ 일제 시대 승려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동인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20여년 전에 죽어서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나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친일파 연구 단체들도 인지도가 낮은 것도 있지만 딱히 이동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진 않고 있다. 이는 이동인이 활동하던 개화기 초기 시절엔 [[이완용]]도 친러파였던 등 오락가락 행보가 많았기에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기 전인 이 시절의 평가는 좀 더 신중하게 해서 그런 것도 있다.[* 실제로 [[김옥균]], [[서광범]], [[어윤중]], [[김홍집]] 등도 개화기 초기 친일파로 활동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는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범선]]은??~~ ~~걘 [[을미사변|너무 심했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