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동진(1931) (문단 편집) == 상세 == 1931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 후 군문에 투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하고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후보직을 사퇴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육인수]] 후보와 무소속 이용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이 집권하자, 구 민주공화당 인사들 중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박유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박준병]] 후보와 [[민주한국당]] [[이용희(1931)|이용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반(反) [[김영삼]] 진영에 섰다. 결국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자 [[이종찬(1936)|이종찬]]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젊은시절 대표적인 여권 인사였음에도 [[김대중|DJ]]에게 꾸준히 안부를 물었던 친화력을 높이 평가한, [[민주당(1991년)|민주당]]으로 영입되었으며, 94년에 귀국한 DJ가 설립한 아시아태평양재단[* 통일 연구 목적으로 세워졌다. 4수 도전에 실패하면 이 아태재단을 통해 여생을 통일 연구 및 정책방안 제시 활동에 매진할 계획이었다고.] 후원회장을 맡았다. 1995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천시]]-[[의왕시]] 지역구에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안상수(창원)|안상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하지만, 1994년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의 모친상에 '''아태재단 명함'''을 지니고 조문하며 [[DJP연합]]의 단초를 마련한 사람으로써, DJ의 대선 행보 동반자(아태재단 후원회장 + 국민회의 경기 과천·의왕지구당 위원장)로 중용되었다.[* 아태재단 후원회장으로 있을 때, 94년 ~ 97년 1월까지 50억 3,000만원의 후원금을 모아 정치를 재개한 DJ에게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90년대 중반의 50억원이면, 2010년대의 120억원에 상당하는 액수이다.] 1997년 1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