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릉대전 (문단 편집) === 전선 고착 === 이후 222년 6월까지,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 이에 [[손책]] 시절부터 섬겨왔던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하여 육손에게 싸우기를 청하나 육손은 칼을 빼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었다. 육손은 이릉에서 포위당한 손환의 구조 요청을 거부하였으며, 왜 손권의 동족을 구원하지 않느냐는 장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촉군을 관찰하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한다.[* 육손전] 육손의 관측대로 이도는 함락되지 않았다. 전황이 고착되자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육손을 유인하려 시도하였으나, 다른 오나라 장수들과는 달리 육손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둔 복병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오고 전황은 고착된다.[* 이 사건의 정확한 시열은 불분명하다.] 이 5~6개월간의 대치 동안 유비군은 형주평야의 입구인 자귀에서 불과 40km 진군한 상황이었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는 400km를 상회하고 있었다.[* 파군에서부터 당대의 물길을 따라 이은 기준. 남군까지 이으면 약 620km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