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릉대전 (문단 편집) === 효정 전투: 육손의 화공, 촉군의 혼란 === 222년 6월.[* 선주전] 육손은 효정의 촉군 진지를 상대로 비로소 공격을 시작한다. 이 무렵 자귀에서 나온 촉군은 이릉, 효정, 이도의 약 40km 범위에 걸쳐 넓게 주둔하는 상태였다. 이중 이도는 최전선의 손환 포위망이었고, 효정은 강건너에 주둔한 본대이며, 후방인 이릉은 황권이 주둔하여 익주로 연결되는 통로인 자귀와 이어지는 후방 연결통로의 역할을 맡았다. 촉군은 [[육손]]의 전략대로 오의 영토내로 5, 6백리를 들어와 장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진영을 형성했다.[* 오서 오주전, 오서 육손전, 촉서 선주전] 이렇게 긴 진지는 상황을 전해들은 [[조비]]가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길거란 소식이 들릴 것이다." 라고 평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시하는 일이었다.[* 위서 문제기][* 700리가 말이 700리지 한나라 시대 700리를 한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는 속초에서 울산까지고 해안을 따라 가는 식으로 하면 속초에서 포항 남부까지다. 휴전선이 아니라 38선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사실상 남한의 남쪽에서 북쪽까지를 진채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육손전과 다른 오서 기전에 파편적으로 남은 기록들을 보면, 촉군은 배를 버리고 진격 속도가 대단히 둔화된 상태였다. 형주 상실 당시 관우가 이끌던 병력은 모두 형주를 장악한 오군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촉군은 장강이 길게 뻗은 형주를 공략하기 위해서 익주에서 키운 수군만을 활용해야 했다. 수군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묘사를 볼 때,[* 오서 육손전] 유비는 익주에서 불과 수년 간 억지로 만들어낸 수군만으로 오의 형주 수군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긴 보급거점 전체를 산지에 배치하는 식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요새화의 대가는 아주 느려진 진군속도와 비대화된 보급소요,[* 쓰촨 분지 내 촉의 가장 가까운 거점인 파군으로부터 물길로 재면 이도까지의 보급거리는 약 400여 km에 달한다.] 초반 기세의 상실이었다. 육손은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촉의 진지들을 화공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최초의 효정 타격 당시 도독 [[풍습(삼국지)|풍습]], 선봉인 [[장남(삼국지)#s-2|장남]]이 사망하였고 유비는 격파당해 퇴각한다.[* 오서 육손전, 촉서 선주전] 이때 [[풍습(삼국지)|풍습]]을 벤 것은 반장이 이끄는 군사였다.[* 오서 반장전] 이로서 촉군은 오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맞서 상황을 수습할 지휘부를 잃게 되었고, 각 진지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풍습과 장남은 지위를 볼 때 효정 본대에 주둔하며 이도의 손환 포위망을 관리감독하던 상태로 보인다. 당시 촉군의 선봉은 강 건너 반대편인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손환이 이후 추격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또한 '포위가 자연스레 풀릴 것'이라는 육손전의 묘사를 볼 때,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한 촉군은 육손의 최초 타격 대상은 아니었고, 효정이 타격당하고 지도부가 궤멸하자 자연스레 포위를 풀고 퇴각을 택했다고 보인다. 앞서 논했던 촉군의 선봉을 격파했다는 주연전의 기록은 퇴각하는 이 포위망 군에 대한 공격기록일 가능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