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명하 (문단 편집) === 초년기 === 이명하는 1878년 1월 23일 경기도 광주군 궁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종(조선)|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인협(李寅協)이며, 백부 이인규(李寅奎)는 진사가 된 뒤 별시 문과에 합격하고 안악, 신계, 장연 등지의 군수를 역임했다. 이명하는 어려서부터 총기를 발휘해 일찍부터 면학에 힘섰고, 1887년 9살 때 부모와 함께 충청북도 제천군 금성면 산곡리로 이사갔다. 이명하는 1888년부터 4년간 [[유인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6년 2월에 유인석이 의병대를 통솔하여 항일 투쟁에 나서자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려 했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의병대가 패퇴하고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는 바람에 가담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897년 3월, 중국 동북지역 회인현 호로두(胡蘆頭)에 은거하던 유인석은 고종의 초유문을 받고 귀국했다. 그러던 중 유인석은 문하생인 백삼규(白三圭), 박재관(朴在觀), 우병렬(禹炳烈)[*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우병렬(독립운동가)|우병렬]]과 동명이인이다.], 최락구(崔洛九) 등과 함께 잠시 제천 지역을 들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명하는 그들을 찾아가 교류했고, 여러 국내외 사정을 들으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898년 3월 유인석 일행은 귀국한지 1년만에 다시 요동으로 떠났다. 이때 제자 74명이 따라 나서자 이명하도 이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부모가 그를 적극 만류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윽고 마을의 유지인 정씨 집안의 딸 정운이(鄭雲伊)와 결혼한 그는 몇년 간 조용히 지내다가 부모의 권고로 서울로 상경해 성균관에 다니면서 임관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