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명하 (문단 편집) === 교육계몽운동과 의병 활동 === 1901년 성균관을 졸업한 이명하는 시험을 치른 뒤 제천군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해 [[황학수(독립운동가)|황학수]], 구연학(具然學), 김진태(金鎭泰) 등과 함께 동명학교를 세워 제천군 백성들에게 계몽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해 한국의 전반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1907년엔 [[정미 7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인 2,080여 명을 관리로 임명하자, 이명하는 이 상황을 참지 못하고 주사직을 사임한 뒤 [[이강년]] 의병대에 가담해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명하가 속한 이강년 의병대는 친일 관리인 안동관찰사, 단양, 영춘, 청풍 군수 등을 참살했다. 이후 1907년 12월 10일 13도 창의군에 가담하기 위해 북상한 이강년 의병대는 경기도 접경지역까지 왔지만 제천을 통과하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자 부득이 평창을 거쳐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하는 험난한 길을 택해야 했다. 결국 이강년 의병대는 13도 창의군에 가담하지 못했고,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개시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한 뒤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이명하는 이강년의 지시를 받고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려 했지만 체포되었고, 이강년 역시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이후 이명하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09년 말 또는 1910년 초경에 석방되었는데, 그가 어떻게 풀려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스승 유인석이 1910년 6월 21일 13도의군을 조직하고 도총재로 추대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실시하려 하자, 이명하는 42명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의병과 해산 군인들을 모으는 <통문>에 서명하여 7월에 반포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추적해오자, 이명하는 황해도로 피한 후 그곳에서 유인석의 문인인 [[이진룡]]의 의병대와 합세해 일본군과 여러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끝내 패하자 이진룡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