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목(전국시대) (문단 편집) === [[진(영성)|진나라]]와의 사투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ingdom&no=37538|이목이 진나라와 치룬 전투들의 위치를 정리한 글]] 이목의 활약과는 반대로 조나라의 정계는 계속 썩어가고만 있었다. [[장평대전]]의 참패로 약해진 조나라를 노린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간신 [[곽개]]는 과거 자신을 비난한 명장 [[염파]]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모함하여 해임시켰다. 때문에 [[염파]]는 분노하여 후임 [[악승]](樂乘)의 [[부대]]를 습격한 후, 그대로 [[위(전국시대)|위나라]]로 망명했다. 거기에 [[조도양왕|도양왕]](悼襄王)이 창씨라는 여자에게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이목은 그녀가 한 집안을 망하게 한 요녀라며 격하게 반대했으나, 도양왕은 이런 이목의 직언을 무시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열녀전]]》 7권 <얼폐전> '도양창후'에 의하면, 이목은 [[조도양왕]]이 음탕한 성품으로 이미 한 집안을 망하게 한 과부 [[창후(전국시대)|창후]](倡后)와 혼인하려 하자 반대하며, "여인이 정숙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불안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한 집안을 망하게 하였는데, 대왕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조도양왕]]은 "나라가 어지럽고 어지럽지 않고는 과인이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라고 말하며 이목의 간언을 무시하고 창후와 혼인했으며, 그 소생의 [[조유목왕|조천]]을 후계자로 삼았다. 허나 《열녀전》은 역사책이 아니라 교양서이기에, 역사적 신뢰도는 낮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열녀전]]은 신뢰도가 매우 낮은 저서이기는 하나 이목은 이 당시 단순한 [[장군]]이 아니라 [[상방]]이기는 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진왕이 막 천하를 아우른 다음 상국과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날 한나라 왕은 땅과 옥새를 바치면서 울타리와 같은 신하가 되길 청했다. 얼마 뒤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포로로 잡았다. 과인은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전쟁이 끝나길 바랐다. 조나라 왕이 그 상국 이목(李牧)을 보내 맹서를 약속하기에 그 인질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 맹서를 어기고 우리 땅 태원에서 배반하였기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잡았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대왕으로 자립하였기에 병사를 일으켜 쳐서 없앴다. 위나라 왕도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안 되어 한, 조나라와 진나라를 습격하려 하기에 진나라 군대가 토벌하여 그들을 깨부수었다." >----- >사기 진시황본기 >기원전 243년, 조나라의 태자가 진나라에서 돌아왔다.[* 이 시기, 조세가 조도양왕편에서 [[춘평군]]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 조의 태자가 춘평군을 뜻하는 말이냐는 추측도 있기는 하나, 조도양왕의 두 자식 모두 사서에 등장하기에 춘평군이 태자였다는 추측은 무리가 있다.] >----- >사기 육국연표 이목이 버티던 북쪽 방면을 뺀 대부분의 국력이 쇠락한데다가 [[염파]]마저 잃은 조나라는, 설상가상으로 통일 대업을 시작하여 [[한(전국시대)|한나라]]를 멸망시킨 [[진(영성)|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236년에 [[왕전]]이 연여를 공격하여 9개의 성을 점령한 후, [[조유목왕]]은 이목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기원전 234년에 이목은 연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둬 무수, 방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때 [[환의]]가 이끈 진나라군이 평양과 무성을[* 국내 사이트들은 평양과 무성의 위치를 다른 곳으로 오인하고 있으나 중국측 위키피디아의 추측에 따르면, [[안양시(중국)]]의 화 현 남쪽에 평양과 무성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진나라가 업을 점령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중국측의 추측이 더 신빙성 있다.] 공격하여 호첩의 조나라군 10만을 죽여 조나라는 큰 피해를 보았다. 당시 조나라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태행산맥 가운데의 성들인 태원과 요양을 진나라가 점령하였다. 따라서 진나라군은 태행산맥을 넘어 한단 북쪽을 공격 할 수 있었다. * 수도 [[한단]]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인 [[업성|업]]도 진나라에게 점령당했다. *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업부터 한단까지는 험준한 지역이 아닌 완전한 '''평야지대'''다! 다만 당시에는 추가적으로 요새와 장성이 한단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고는 한다. * [[장평대전]]의 45만 [[포로]] [[학살]] 이후로도 조나라군의 피해는 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19만'''에 달한다.[* 진나라 장수 [[규]]가 조나라군 9만을 죽였고, [[환의]]가 [[호첩]]이 이끈 조나라군 10만을 죽였다.] 게다가 이 숫자는 [[염파]]가 승리한, 정말 나라가 망할 위기였던 연조전쟁의 사상자수를 비롯한[* 이 당시 연나라군의 침공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사기 기준으로는 전차 2천승, 즉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침공했다고 한다.] 여러 전투의 사상자가 포함되지 않은 집계이기에 실제 피해는 이것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높다. 이목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진나라군의 침공을 연거푸 꺾는다. 괜히 [[백기(전국시대)|백기]], [[왕전]], [[염파]]와 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에 이름을 올린 것이 아닌 것. 기원전 233년 이목은 조나라 장수 [[호첩]]을 전사시킨 진나라 장수 [[환의]]와 맞붙었고, 예전에 [[흉노]]를 상대했던 때처럼 전투를 피하며 수비에 열중하면서도 장병들을 잘 먹이고 푹 쉬게 하면서 훈련을 시켰다. 의안에서 수성만 고수하던 이목을 끌어내기 위해 환의가 비하를 치러 출정하자, 이목은 바로 환의군의 본진을 습격하여 함락했다. 환의는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회군했으나, 이목은 귀환하던 환의군을 일부의 [[병력]]으로 정면을 막은 뒤 주력을 양쪽으로 나눠 협공시키는 기동전술을 펼쳤고, 환의군은 사상자가 10만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비하 전투'''라고 하는데, 이는 [[전국시대]] 말기 전투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전투였다. 이 비하 전투의 승리로 이목은 [[조유목왕]]으로부터 무안군의 칭호를 받았다.[* [[백기(전국시대)|백기]]와 같은 봉호이다.][* [[환의]]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엇갈린다. 죽었다는 설, 서민으로 강등당했다는 설, 연나라로 망명해 [[번오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이목은 기원전 232년엔 다시 쳐들어온 진나라의 대군을 번오에서 철벽수비로 막아냈다.[* 이 당시 번오는 남번오와 북번오가 있었다고 하는데, 북번오는 의안 근처의 도시이며, 남번오는 업 근처의 도시로 평양과 무성 근처의 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이목이 번오를 공격한 진나라군을 꺾고 위나라와 한나라의 군대와 대치했다는 기록을 보면 진나라군은 남번오를 공격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3년 뒤 기원전 229년 진나라는 [[왕전]]과 [[양단화]], [[강외]]를 대장으로 다시 공격했다. 당시 사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시황제]] 18년(BC 229년), 군사를 크게 내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형(井陘)[* [[한신]]이 [[정형전투]]를 치룬 곳이다.]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시황제]] 19년(BC 228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 >《사기》 <진시황 본기> 여기서 [[왕전]]이 이끈 진나라군이 공격한 정형은 의안 근처에 있는 성이므로 [[왕전]]은 태행산맥을 넘어서 한단의 북쪽에서 침공한 것이고, [[양단화]]가 진나라군을 이끌고 출발한 하내(河內)라는 곳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만약 [[황하]]의 안쪽이라고 하면 황하의 이북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내가 '하내현'을 의미한다면 [[위(춘추전국시대)|위(衞)]][* [[전국칠웅]] 중 하나인 위나라가 아니라, [[상앙]]의 고향인 위나라를 말한다.]의 땅이었던 하내현을 뜻한다. 일단 어느쪽이건 [[양단화]]는 [[왕전]]과 달리 한단 남쪽에서 침공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정황을 보자면 [[양단화]]가 남쪽, [[왕전]]이 북쪽에서 진군하여 조나라의 수도를 '''쌈싸먹기'''하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고, 게다가 앞서 설명했지만 요새와 도시들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한단 주변은 '''평야지대'''다! >18년에 [[왕전]]은 병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공격하길 1년 남짓, 마침내 조나라를 무너뜨리니 조왕은 항복했다. 이렇게 조나라의 땅을 모두 평정하여 군으로 삼았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7년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의 대장 이목, 장군 [[사마상]](司馬尙)이 반격했다. 이목이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파면되었다. 조총(趙怱)과 제나라의 장수 안취(顔聚)가 그들을 대신했다. 조총의 군대는 격파당하고, 안취는 도망쳤다. 조왕 천이 항복했다. >8년(기원전 228년) 10월에 한단이 진나라의 땅이 되었다. >----- >사기 : 조세가 조유목왕편 여기서 이목과 [[사마상]](司馬尚)은 진나라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하여 멸망의 위기를 잠시나마 막아냈다.[* 《사기》와 《[[전국책]]》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사기》에서는 간단히 '이목과 사마상이 진나라 군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전국책》에서는 '전에 이목에게 패했던 환기가 도망치지 않고 왕전의 부장으로 계속 종군하다가, 이 때 이목에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당시 이목과 [[왕전]]은 전투를 치뤘고, 왕전은 꽤나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기원전 229년에 시작된 전쟁이 기원전 228년 10월에서야 끝나 조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목은 1년 동안 진나라로부터 조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로써 조나라는 한창 승승장구하던 진나라의 기세를 잠시나마 꺾어놓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