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밀 (문단 편집) === 탈출해서 세력을 일으키다 === 이밀은 술과 음식을 살 수 있도록 요청해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으며, 저녁 때가 되어 위군의 석량역에 도착해 방비하고 지키던 사람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담장을 뚫고 도망쳤다. 이밀은 도망가 학효덕, 왕박 등에게 의지했지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곤궁하고 궁핍해 나무 껍질을 깎아내어 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회양의 시골집에 숨어 성, 이름을 바꿔서 무리를 모아 가르치다가 군현에서 의심해 잡으려고 하자 도망가서 옹구현 현령인 매부 구군명에게 갔다. 그러나 구군명은 받아들이지 않아 협객 왕수재의 집에 머물게 했으며, 왕수재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구군명의 당질 구회의가 이 일을 고발해 이밀에 대한 체포가 내려졌지만 마침 이밀은 자리를 비웠기에 무사할 수 있었고 옹구에서 외강으로 망명했으며, 외강에서 여러 세력들이 모여 천하를 빼앗는 책략에 대해 유세했지만 처음에는 모두 믿지 않다가 오래 지나자 점차 그런 것처럼 여겼다. 이밀은 외강의 세력 중에 가장 강한 적양에게 투항해 그와 일을 꾸몄으며, 수나라의 장수 장수타를 격파한 일로 인해 이밀에게 아장이 세워지고 따로 부하들을 거느려 포산공영이라 불리면서 힘을 가지게 되었다. 617년에 이밀은 여양(黎陽)의 곡식 창고인 낙구창을 함락한 후,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니, 불과 10여일만에 이밀의 군대는 30만명으로 세력이 급속히 불어났다. 또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위공(魏公)으로 추대받았고 조, 위 남쪽, 장강, 회수의 북쪽 지역의 세력들이 이밀에게 모두 호응했으며, 하남 대부분의 군현은 이밀의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이어서 이밀은 또다른 창고인 회낙창까지 공격하여 점거한다. 이밀의 밑에 있던 시효화는 이밀에게 [[적양]]을 낙구창에, [[배인기]]를 회낙창에 남긴 뒤 이밀 자신은 장안을 습격하여 점령, 그곳에서 군사들을 길러 동진해 하남을 마저 평정한다면 남은 천하는 격문 한 장으로도 평정될 것이라 유세했다. 이밀은 시효화의 계책을 옳게 여겼지만 아직 양제가 살아있고 자신 밑의 장수들은 모두가 산동 출신이라 낙양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따라 장안으로 가지 않으려 할 것인데, 이들은 도적떼 출신이라 남겨두고 서진한다면 각기 자웅을 다투려 할 것이므로 대업이 어그러지게 될 것이라 걱정한다. 이에 시효화가 자신을 보내달라 청하자 이밀은 허락한다. 시효화가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섬현에 이르자 주변의 산적 만여 명이 그에게 귀부해왔다. 그런데 당시 이밀이 전투 중에 유시에 맞아서 병영에 드러눕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단달과 방옥 등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밀을 공격해 이밀은 회낙창을 버리고 낙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효화가 모은 무리는 이밀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 흩어졌으며, 시효화도 별 소득 없이 이밀에게 돌아왔다. 이후 이밀은 동도의 군사들과 회낙창을 놓고 일진일퇴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고[* 시효화는 이 과정에서 전사한다.], 이러는 사이에 장안은 진양에서 일어난 [[고조(당)|이연]]이 장악하게 된다. 4월에 동쪽으로 진군해 여러 차례 동도를 공격해 [[수양제]]가 보낸 [[왕세충]]과 싸웠으며, 적양과 가까운 사람들이 적양에게 이밀의 권력을 빼앗기를 권했지만 거절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밀은 적양을 미워했다. 적양이 최세추에게 재물을 요구한 일을 했다가 적양이 방언조에게 여남을 격파하고 보물과 재화를 얻으면서 이밀에게만 주고 자신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이밀을 자신이 세웠으니 세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가 방언조가 이를 이밀에게 알리자 적양을 술자리에 불러 죽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