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방자 (문단 편집) == 여담 == *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고 한국어는 사망할 때까지도 서투른 편이라서, 대부분의 대화도 거의 [[일본어]]로 했다. [[드라마]] 작가인 [[신봉승]] 선생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2011년), 일본인 혼다 세츠코(本田節子)의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년) 등에는 이방자 여사의 한국어 실력에 관해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방자 여사의 생애 중 한국어에 노출된 시간이 과연 얼마였을지 생각해보면, 한국어에 서툴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이방자 여사는 원래 일본인이었고, 결혼한 후에도 내내 일본에서 지내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해 회복하여 한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때는 이미 노년이라 외국어를 새로 배우기는 힘들었다. 또한 남편 [[영친왕]]도 어려서 일본으로 끌려가 인질 생활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탓에 일본어가 유창했고, 소위 [[옥음방송]]이 있던 1945년까지 눈치가 보였는지 왕래하던 한국인들 앞에서도 한국어로 말한 바가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자체는 숨을 거둘 때까지 유창했다고 한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되었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보면 서툰 한국어 실력[* 엄격하게 말하면 발음 문제이지 대한민국 사람이면 어느정도 알아들을수 있는 상황이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1595_19354.html|당시 이방자 여사 인터뷰]])[* 자세히 들어 보면 [[순헌황귀비]]를 [[시어머니]]라고 인터뷰 했다.] * 국적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이제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한국인으로서 살려는 의지를 보였고, 경계인으로서 생애나 사회사업과 자선사업 등의 말년 행적 때문인지 국내에서의 평가도 우호적 또는 동정적인 편이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220240380961|이방자, 봉사와 헌신의 기품(한국일보)]] >내게는 2개의 조국이 있다. [[일본|하나]]는 나를 낳아준 곳이고, [[대한민국|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영친왕|내 남편]]이 묻혀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는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 >―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中.[* 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722|#]].] * 다만 일부 다른 관점에서 본 반론도 존재한다. 온당치 못했던 결혼 과정 자체가 결국은 [[대한제국]] 황족의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으로, 이 설에 따르면 이방자가 시집가기 전 친정아버지 모리마사 왕이 이방자를 앉혀놓고 "남편을 잘 감시하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와 딸의 생각이 같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이후 이방자 여사의 삶을 보면 딱히 남편을 감시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또 아버지의 말도 좋게 해석하자면, 단순히 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사위]]가 [[일본 제국]]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딸의 인생도 고단해질게 뻔하니까. 애초에 자신의 혼인 자체를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을 정도로, 어찌보면 이방자 역시 [[정략결혼]]의 피해자였다. >망국한을 되씹으며 몸부림치는 [[영친왕|그 분]]을 보며, 나는 한·일 융화보다 외로운 그분의 따뜻한 벗이 되고자 했다. 암담한 인생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이방자,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 中.[* 출처 :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3/09/794921/|#]].] * 황손 [[이석]]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방자 여사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을 사회봉사 등 자신의 자선활동에만 썼다"고 주장했지만, 이석이 논란이 있는 사람인만큼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히려 이석 씨야말로 중앙정부나 문화재청도 아닌, 전주시민들의 세비를 그것도 무상에 어거지로 받아 승광재라는 곳에 살면서 멋대로 사용(私用)해 몇 번씩이나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 한국에 귀화한 이후 남편 [[영친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당시 한국에서 아직 진행되지 않았던 장애아동 교육[* 주로 지적장애아, 지체장애아.]에 몰두했다. 그는 1967년 [[경기도]] [[안산시]]의 [[소아마비]] 및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http://www.mhw.or.kr/main/|명휘원]]'을 설립했고, 1971년에는 [[수원시]]에 지적장애 어린이 학교인 '[[http://www.jh.sc.kr/|자혜학교]]'를, 1982년에는 [[광명시]]에 [[특수학교]] '[[http://www.myhe.sc.kr/home/index.do|명혜학교]]'를 잇달아 세웠다. 학교와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그는 정부 지원 외에 자신의 서예와 그림, 자수 등 작품들로 자선바자를 열곤 했다. * 그가 설립한 장애인 보호시설 명휘원의 이름은 남편 [[영친왕]]의 아호 '명휘(明暉)'에서 따온 것으로, 이방자가 196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종로구)|인사동]]에 설립한 것이 그 시초다. 1983년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은 이방자 여사는 2년 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통해[* 이방자 여사가 1989년에 사망한 후, 김수환 추기경은 [[창덕궁 낙선재]]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를 주례했다.], 1985년 [[http://www.solph.or.kr|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 운영을 맡겼고, 1990년 현 장소로 이전됐다.[[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161906|#]][[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177499|#]] 이 수녀회에서 이 여사가 설립한 명혜학교도 인수해서 그 뜻을 이어받아 운영 중이다. >“(이방자 여사는) 당신의 정신과 사랑을 불우한 이들, 지체장애인들에게 쏟으셨습니다. 때문에 복음에서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이분에게 그대로 해당된다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세례성사|영세]]하시고 [[예수|그리스도]]께 귀의하신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분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일찍부터 계셨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 >― [[김수환]] 추기경, 이방자 여사 [[죽은 이를 위한 미사#장례 미사|장례 미사]] 강론 中[[https://news.cpbc.co.kr/article/76002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60020_1.9_titleImage_1.jpg|width=100%]]}}} || || {{{-1 {{{#fff ▲ '''이방자 여사와 김수환 추기경'''}}}}}} || * 취미이기도 했던 [[칠보]]소식의 특기를 살려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오늘날 현대 칠보는 1960년대 말에 김기련(金琦連)씨, 이방자 여사와 같은 독일과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온 인물들에 의해 칠보 유약의 개발, 교육 등 본격적으로 보급·발전됐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09741|#]] * 기금 마련을 위해 [[칠보]]와 자기, 글씨, 그림 등을 그려 전시회도 열었으며, 하루 종일 일을 하여 20~30개의 반지, 브로치 액자 등을 만들어 바자회도 열고, 궁중의상 쇼도 열며 자금을 모았고[[http://art.chosun.com/m/article.html?contid=2016100501012|#]], 그 돈으로 지적장애아동시설인 명휘원과 지적장애 양호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했다.[[https://ja.m.wikipedia.org/wiki/%E6%9D%8E%E6%96%B9%E5%AD%9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220_3598_051.png|width=100%]]}}} || || {{{-1 {{{#fff ▲ '''칠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이방자 여사'''}}}}}} || * 생전 [[창덕궁]] 옆에 위치한 [[중앙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교사 몰래 꽁초를 [[창덕궁]] 안에 던져 처리하는 일이 있고는 했다는데, 이방자 여사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디서 감히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냐"며 크게 역정을 내고는 했다고 한다. * 가장 즐겨 쓰고 좋아했던 글자는 '화합할 화([[和]])'[* 출처 : [[https://news.cpbc.co.kr/article/760020|#]].] * 어느 날 [[창덕궁 낙선재]]에 낯선 [[스님]]이 불쑥 나타나 친척이라며 면회신청을 했다. 이방자 여사는 처음에 어리둥절 하다가 스님이 "자신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라고 설명을 하자 활짝 웃으며 “맞아요. [[전주 이씨]]는 모두 일가친척이지요. 친척 스님이 귀한 걸음을 하셨네요.”라고 말하며 반겨주었다고 한다.[* 출처 :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5/05/04/2015050400025.html|#]].] * [[1973년]] 숙원사업이던 영왕([[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영친왕과 왕가의 유물들을 보전하는 데 마지막 사명을 다하였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346|#]] * 이방자 여사는 1981년 4월 20일 장애인 복지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사후인 1989년 6월 1일 국민훈장의 최고 등급 무궁화장에 추서됐다. * 복지단체 '자행회'를 발족시킬 때 부터 이방자 여사와 [[특수교육]]을 함께 했던 김수임 할머니는 책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를 통해 이방자 여사의 사회봉사를 기리는 한편, 그를 참배하기 위해 한달에 2번씩 어김없이 '영원'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0370|기사]]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늦가을, 이방자 여사가 부군인 영친왕의 복지사업 뜻을 받아 특수학교 견학 차 김수임 할머니의 장남이 교사로 근무하던 수원농아학교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김수임 할머니는 [[일본어]]가 능숙했고, [[중국]]에서 일본인과 같은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일본 요리]]도 곧잘 만들어 이방자 여사와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고 한다. 더욱이 복지사업을 구상하던 이방자 여사에게 할머니는 '장애인 교사'의 어머니로서 대단한 열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첫 눈에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힘을 합쳐 1967년 심신 장애아를 위한 복지단체인 자행회(慈行會)를 발족시켰다. 1971년에는 사회복지법인 명휘원(명휘는 영친왕의 아호)을 설립하는 등 그 당시 개념조차 정립이 안 돼 있던 '장애인 복지와 사회복지'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김수임 할머니는 이방자 여사와의 첫 만남부터 계속되는 참배에 대한 소회를 풀어 지난 1월 15일 <영왕비 전하의 뜻을 따라>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김수임 할머니는 이방자 여사와 얽힌 여러 가지 일화를 잔잔하게 들려준다. 이 책에 글귀 중 하나다. >"본의 아니게 일생을 두 나라 국민으로 일본에도 한국에도 성(誠)을 다하신 그분을 곁에서 25년 동안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아껴주신 고마움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하며 고집쟁이 내 인생의 역사를 바꾸어주신 덕분에 오늘도 남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나날이 나이를 잊고 힘에 겨운 목표를 향해 기적을 바라며 살고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0370|#]] * 1983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682272|#]] * 이방자 여사가 사망하기 8년 전인 1981년 새해 초, 당시 톱스타였던 장미희가 [[창덕궁 낙선재]]로 이방자 여사를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주제는 '여자의 행복'.[[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37|#]] * [[자서전]]으로 《지나온 세월》, 《세월이여 왕조여》를 남겼다. 《세월이여 왕조여》는 《[[경향신문]]》에 1984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해 1985년 [[단행본]]으로 나왔으며 2013년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세월이여 왕조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후 황손 이구가 사망한 2005년까지 조선 황실의 근황을 정리하여 보완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KovKW9zYCA, height=240)]}}} || * 2009년에는 이방자 여사의 일생을 담은 평전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이 출판됐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시즈오카복지대학 명예교수 오타베 유지(小田部雄次)가 저술했다. * 2010년, 친필 일기가 공개됐다. 1919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총 136일의 기록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로서의 설레는 감정과 약혼자 영친왕에 대한 연민,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발생한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승하와 그로 말미암아 결혼 연기, 영친왕의 고국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등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79/0002131809|#]] * 2015년에는 이방자 여사가 설립한 자혜학교에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동상이 세워졌다. 약 3m 높이의 제단 위에 놓인 동상은 이 여사와 영친왕이 나란히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해 지역 사회·교육 관련 단체와 종교계 인사,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도 참석해 축하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50508096800061|#]] * 2018년에는 이방자가 손수 만든 작품들이 전시회로 대거 공개됐다. 칠보 한복부터, 어릴 적 쓴 글씨와 그림, 도자기 등 200여 가지가 공개됐다. 밑 그림 한매쌍작'(寒梅雙雀·연도미상)은 이방자의 수묵채색화 중 대표작이다. 1970년 사망한 남편 영친왕을 그리워하며 즐겨 그리던 주제라고 한다.[[https://n.news.naver.com/article/018/0004219185?sid=103|#]] 뿐 아니라 여러 수묵채색화 작품을 남겼는데, 자선사업을 위해 다작을 한 편이라서 가격대가 그리 높지 않아 고미술 매니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자선사업으로 도자기도 많이 남겼는데,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고 천한봉, 유근형 등의 1세대 도예가들의 작품에 수결을 넣어 완성한 작품들이다. 1세대 도예가들이 워낙 대단한 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방자 여사의 도자기도 인기가 많다. 아무래도 역사책에도 등장할 만큼 대중적 인지도도 있는 편이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S18100800015.jpg|width=100%]]}}} || || {{{-1 {{{#fff ▲ '''한매쌍작(寒梅雙雀)'''}}}}}} || * 2019년 사망 30주기를 맞아 일본에서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http://localsegye.co.kr/news/newsview.php?ncode=1065579221020139|#]] [[요미우리 테레비]]에서도 특집 방송을 하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B0QIdXfVFgQ|방송]] * 2021년 그가 보관하던 조선시대 왕가의 어린이들이 입은 옷이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영친왕]]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문화재청]]은 "영친왕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전하지만 옷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고, 옷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실제 영친왕이 착용했다고 특정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이 복식 유물은 1998년 [[숙명여자대학교]]가 기증받았고, 이방자 여사가 보관하던 것으로 전해진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26074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