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도 (문단 편집) == 기타 == * 굉장히 장수하는 집안이다. 이병도 박사는 5남 5녀의 자식이 있는데 1991년 53세의 나이로 별세한 4녀 이영희(李永姬, 1937. 4. 5 ~ 1991)와 2002년 88세로 별세한 장남 이기녕(李基寧, 1913. 7. 26 ~ 2002. 1. 29) 박사, 2016년 99세로 별세한 차남 이춘녕(李春寧, 1917. 3. 27 ~ 2016. 7. 31)[* 족보상으로는 이병도의 넷째 형 이병렬(李丙烈, 1890. 12. 19 ~ 1972. 4. 9)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카가 된다.] 박사, 2019년 95세로 별세한 3남 이태녕(李泰寧. 1924. 2. 8 ~ 2019. 3. 6) 박사, 장녀 이순경 여사를 제외하고 모두 생존해 있다. 이춘녕 박사는 농학계의 권위자이며 [[이장무]][* 2006년 그가 취임할 당시에 부친을 [[친일파]]나 식민사학자로 음해하는 반대 세력 때문에 큰 곤혹을 치르어야 했다.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 '[[매국노]] 후손 이장무 개xx는 물러나라!' 식의 플래카드들이 걸려있고 스피커로 음악을 틀기도 했다.] 전 [[서울대학교]] 총장, 고고학자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전 [[문화재청장]], [[용인대학교/대학원|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의 부친이다. 한국추상화가 [[장욱진]][* 장욱진 화백은 평생 장인어른인 이병도 박사에게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이유는 딸 이순경 여사를 고생시켰기 때문이다. 이순경 여사는 [[서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으며 이병도 박사는 1번도 [[사위]]의 전시회에 간 적이 없으며 장욱진 화백도 "처가는 다 박사야, 사람은 나 혼자"라는 말로 처가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다. 장욱진은 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위치하는 교동에 고택을 짓고 여생을 보내는데 교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향교]]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는 용어다. 다만, 용인향교는 [[법정동]]인 언남동에 위치해 있다. 과거 용인군청이자 現 구성동사무소 뒤편에 위치. 거기에 향교는 오늘날 공립중고등학교와 같은 위치로 지방을 관리하는 [[행정]] 기관 가까이 위치하였기에 용인이 1914년 이전에는 구성에 용인을 관할하는 행정 기관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에 이병도 집안이 용인 교동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욱진이 처가를 물려받아 살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라고 했었지만, 장인은 현 이동읍에서 태어난 것이고, 위 고택은 화백의 말년을 보내기 위한 세운 것이다.] 화백의 부인인 장녀 이순경(李舜卿, 1920. 9. 3 ~ 2022. 8. 18) 여사는 1920년 9월 3일생으로 2022년 101세로 별세하였다. 나머지 자녀들도 80~90대로 모두 생존해 있다. 4남 이동녕(李東寧, 1927. 7. 22 ~ ) 박사는 1927년 7월 22일생으로 94세, 차녀 이운경(李雲卿, 1931. 9. 9 ~ ) 원장은 1931년 9월 9일생으로 90세, 5남 이본녕(李本寧, 1936. 1. 14 ~ ) 박사는 1936년 1월 14일생으로 86세다. *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친일파인 [[해평 윤씨]] [[윤치영]] 집안과 3중 [[사돈]]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이병도의 맏형 이병묵(李丙默, 1876. 6. 19 ~ 1950. 2. 12)[* 초명 이규병(李奎炳).]의 셋째 아들(이병도의 조카) 이재녕(李宰寧, 1918. 5. 4 ~ ?)[* [[도쿄농업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농어촌진흥공사]] 감사 등을 역임했다.]이 윤치영의 둘째 형 윤치소(尹致昭)의 딸 (윤치영의 조카이자 [[윤보선]]의 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 2. 13 ~ ?)과 결혼하여 이중 사돈, 윤치소의 누나 윤노덕(尹老德, 1890. 6. 14 ~ ?)이 이병도의 6촌 재종형(再從兄) 이병림(李丙琳, 1890. 6. 18 ~ ?)과 결혼하여 삼중 사돈이다. 그밖에도 이병도의 장인은 일본군 중장을 지낸 [[조성근]]이다. * 이러한 개인가족사 외에도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것 때문에 치암 [[신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친일인명사전 2권 876~877P). 사전에 등재된 그의 활동 내역은 1925년 8월에서 1927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일했으며 이후 1938년 6월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청구학회 활동 경력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병도의 제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이병도 등의 진단학회 창설 경위가 청구학회에 편승하고자 했다고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9337.html#cb|주장했다.]] 다만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학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증언에 의하면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1명인 이병도 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 조선연구월보,14,1963 원 출처: 연속심포지엄 「일본에 있어 조선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 6 회,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을 중심으로>(32P), 조선연구월보 14, 일본조선연구소,1963.]라고 하여 이 부분은 함부로 속단하기 어렵고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 외에 [[역사]] 왜곡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소속 기간이 장기간에 달한다는 점에서 친일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수사관보'와 '촉탁'의 신분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참여한 [[조선인]] 중 1명이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역대 수사관보는 총 10명으로 그 중에서 조선인은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등 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특히 조선사편수회는 스스로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직속으로 설치된 "하나의 새로운 독립 관청"이라고 규정했던 점이 있는만큼 실제로 이병도의 이름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올라있다. *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이병도는 교사 생활 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한 것이었고 무급으로 근무한 것과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 등으로 인해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도 하고 있다. 그 밖에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도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天理大學)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증거가 증언 밖에 없는데다 증언이 정말 사실인지도 불확실하다. * 흔히 웹상에서 볼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과 혼동된 결과로 추측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이병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다. *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에 보면 1979년 [[이완용]]의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중인 관뚜껑을 이병도가 개인 연구에 쓴다고 가져가서는 불태워 버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8선에 빛나는 그가 [[지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병도를 변명하는 입장의 이야기로는 관뚜껑을 없앤게 어차피 조리돌림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게 낫다고 판단했지 않나 말한다. 몇몇 이들은 이완용 때문에 평생 시달린 까닭에 이완용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어 사학자로서의 책임감을 버리고 개인 [[감정]]을 우선한 결과라고도 한다. * 1984년 잡지 '학원'과 [[인터뷰]]에서 이병도는 이완용과 관계성을 부인하다 못해 이완용은 "[[익산시|익산]] 출신이다"라고 슬쩍 흘리는데 이 말 때문에 실제로는 [[경기도]] [[성남시]] 지역 출신인 이완용이 졸지에 [[전라도]] [[반역향]]의 화신 쯤으로 지역 감정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완용의 '익산 출신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병도의 1984년 학원지 대담 사실을 주구장창 들고 나와 논쟁이 컸었다. 이완용과 이병도는 성남 판교의 [[우봉 이씨]] [[집성촌]]이 [[고향]]으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현 [[한국토지주택공사]] [[토지주택박물관]]]이 [[이완용]] 생가에 대해 원주민 증언과 더불어 2001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1번지 또는 223번지[* 233번지라고도 한다.]로 생가터를 확정한 사실이 있다. 이후 2005년 성남시청에서는 이 생가터의 위치를 백현동 226-1번지[* 현재 이 지번은 판교지구 개발로 사라졌다. 다만,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위치가 [[https://mlbpark.donga.com/mp/b.php?p=31&b=bullpen&id=202111210062747649&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reply&sig=h4aTSg-AghTRKfX2h4a9Gf-A5mlq|백현마을 8단지 804동]] 인근이라고 한다.]로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001&oid=086&aid=0000023369|바로잡았다]]. 물론 이완용과 이병도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이병도가 특혜를 받은 것이 적어도 드러난 것은 없어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역사학자로서 온당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게 한다. * 사실 이병도가 이완용 [[후손]]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쓰는게 어떤 곳에서는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조카라고도 한다. 같은 편끼리도 말이 엇갈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단법인 모 단체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환단고기]]를 참된 역사라고 하며 [[최태영]]을 두둔하고 이병도 박사를 '식민사학의 거두, 이완용의 조카'라는 되도 않는 강의를 하고 있다. 다만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자택에서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는 이운구 [[성균관대학교]] 전 교수(우봉 이씨)의 증언과 더불어 사학자로 적절치 못한 부분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병도의 부친 이봉구는 1907년에 죽은걸로 알려져 있어 집사를 언제 한건지는 사실 검증이 필요하다. 그가 회장을 8선이나 하고 원로위원까지 역임한 학술원에서도 이완용과 관계성을 두고 뒷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이런 뒷말에 대해 이완용과 이병도는 관계가 없다고 [[http://www.breaknews.com/29156|밝혔다]].[[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274194661|관련 블로그]] * 위 이야기들에 덧붙이자면, 일단 이병도(李丙燾)와 이완용(李完用)은 각각 25세 병(丙) 항렬, 23세 용(用) 항렬을 쓰고 있어 항렬상으로는 족조(族祖)-족손(族孫) 간으로, 이완용의 조카라는 말은 절대 될 수 없다. 그리고 같은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이긴 하지만 공통 조상이 감찰공파 파조 이기(李圻)로, 이완용은 이기의 장남 이승녕(李承寧)의 13대손이고 이병도는 이기의 차남 이승건(李承健, 1452. 1. 25 ~ 1502. 12. 6)의 15대손이다. 촌수로는 30촌 지간이니 사실상 남이다. 게다가, 이완용은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 후손이었기에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병도와 이완용은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 * 1956년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암살당하자 그의 묘가 [[관악산]]에 있던 시절 묘비명을 이병도가 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일제]]의 개였다가 건국 이후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개가 되어 [[6.25 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의 온갖 전횡을 일삼은 김창룡을 비판하는 내용이 묘비명에 하나도 없고 호국의 [[영웅]]으로 찬양하고 미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 언론인 [[김삼웅]]의 칼럼에 의하면 이병도는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봉기했다"며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298627|쿠데타를 미화하는 칼럼을 기고한 바 있었다.]] * 그가 회장으로 몸담았던 진단학회에서는 1980년부터 매년 그의 호를 딴 '두계학술상'을 시상한다. *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속설([[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처벌해서 옥사하고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웠다는 속설)을 처음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 한국 사학계의 [[서울대학교]]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이들 주류 사학자를 '서울대 학파'라고 지칭한다. 학자들 본인은 '강단 사학'이나 '서울대 학파'라고 자칭하지는 않는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과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잡지 '폐허'의 동인이기도 했고, 이병도의 아내인 조남숙과 김명순은 진명여학교 동문이었다. 이 인연으로 인해 김명순은 한동안 이병도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책을 교열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병도 본인도 훗날 김명순과의 인연에 대해 회고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