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도 (문단 편집) == 평가 ==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__전혀 없다__'''. 이미 이병도 생전에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병도 자신이 "요즘에는 [[이기백(1924)|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학술적으로도 상당히 비판받은 부분이 많은데 특히 그가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 주장해 온 '진한=[[한강]] 유역설'은 무리한 점이 많아 살아 생전에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대사 연구에서 지나치게 음상사(音相似)에 의존한 연구 결과들도 비판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 백제의 도성([[하남위례성]])을 둘러싼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논쟁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이 위치한 [[풍납동|풍납리]](風納里)를 '바람들이'로 뜻을 풀어서 '''바람들이→바람드리→배암드리'''와 같은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 유적이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때문에 풍납토성 내에 [[아파트]]와 연립 주택들이 지어져버렸다.] 하지만 이후 [[고고학]] 조사 결과 나온 유물의 수와 토성의 규모는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가볍게 발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주장은 폐기당한 상태다. [[충주 고구려비]] 관련 연구에서 "꿈에서 봤다" [[드립]]을 쳤는데 얼마 전 충주 고구려비에서 '영락7년 세제정유' [[글자]]가 판독되면서 역사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기도 하였다. 《역주 삼국사기》와 《역주 삼국유사》에서 보여 준 오역들과 1970~1980년대 [[사육신]] 논쟁에서 보여 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때문에 [[부산대학교]] 이재호 교수에게 엄청나게 비판받은 적도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한문]]으로 된 고전을 해석하는 능력이 저하되는 현상은 현대 한국이 아닌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사회주의 역사학의 거장이라는 [[백남운]]도 [[정인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전을 오역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진 정당한 비판이니 억지로 점철된 [[환빠]]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꾸준한 비판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비판도 있다. 재야 사학이라 자칭하는 환빠들의 비판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실제로 이 비판을 시작한건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이다. 일단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히려 그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100여 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다.[* 여기서 말하는 건국연대는 왕 중심의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보이는데 백제같은 경우 고이왕 대에 율령이 반포되었을 정도였다.] 이병도 본인은 광복 후에 식민사학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주장 관련 자료를 보면 이병도의 [[단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위만]]은 조선인이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도 이병도라는 것.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병도가 [[일본 제국|일제]] 식민사학자들한테 이어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서북한 일대로 비정한 견해는 그 뿌리가 가깝게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사회주의 사학의 경우는 이병도의 개인사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에서의 이병도 비판은 백남운이 월북한[*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인보의 납북도 친우였던 백남운이 주도하였으나 정인보는 전쟁기의 납북으로 인한 여독으로 과로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전 시기 이후로는 정체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그 분들이 그리 말했다는 식으로 [[강의]]에서 언급된다. 광복 이후 친일 문제의 역사학적 평가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학자 및 사회주의 사학자들과 대립한 탓에 진단학회가 폭삭 무너진 경우도 있어서 평이 썩 좋지는 않다. 단, [[정치]]적 상황으로 봐서는 실증 사학의 사정이 나았는데 민족주의 사학자는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신채호]], [[박은식]] 등은 안정적인 학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저서 몇 권만을 남긴 채 사망하였고 일제의 직접적인 역사학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학계에서 신채호는 사상 문제로 반 매장 상태였고 [[안재홍]]이나 [[정인보]] 등은 납북당했다. 사회주의 사학 또한 광복 이후 남한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백남운]]과 [[김석형]]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다. [[북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연구 성과를 낸 바 있으나 사상색이 섞이지 않는게 사실상 힘든 상황이고 남한에는 더더욱 전해지기 어려웠다.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런 [[학자]]들이 살아있었다면 역사학의 방향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병도를 비난하는 부류 중 환빠와 같은 [[유사역사학]]은 정작 이병도의 방식을 답습하거나 오히려 이병도보다 더욱 후퇴한 방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유사역사학에서는 시대에 따른 지명의 변천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글]] 독음만 같고 [[한자]]는 다른 지명을 동일시하면서 [[언어]]의 유사성에 따른 추론을 맹신하는데 이는 이병도의 음상사 연구보다도 더욱 뒤떨어진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혈통]], [[민족]], [[영토]]의 구분 및 관계를 매우 자의적으로 행하는데 이병도의 '위만 조선인설'과 같은 특유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이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