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금 (문단 편집) == 의미 == 《[[삼국사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김대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금은 '잇금'[* 당대 발음은 닛금(niskum)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치아를 '니'라고 했는데 후대에 'ㅣ' 모음 앞의 ㄴ이 [[구개음화]]되면서 어두에서 발음하기 힘들어져 어두에서는 '이'가 되었다. 하지만 '어금니', '송곳니'처럼 어두 외에는 여전히 '니'로 읽혀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자어의 [[두음법칙]]과 동일한 방식.]의 신라 방언으로 '이질금(尼叱今)'이나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불리며 이 호칭의 유래는 [[남해 차차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해 차차웅이 아들 유리 대신 사위 [[석탈해]]를 후사로 삼으라 유언을 남기고 붕어하자 사람들이 유언대로 탈해를 차차웅으로 옹립하려 했는데, 탈해는 이를 사양하고 선대 차차웅의 적장자인 유리가 차차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해 차차웅의 유언도 있고 해서 차차웅 자리를 사양할 뾰족한 명분이 없었고, 이에 "내가 들으니 이가 많은 사람이 현명하다고 하니 잇자국 수를 세어서 더 많이 나오는 쪽이 차차웅이 되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하여[* 정확히는 이가 많다 = 나이가 많다 = 현명하다 라는 뜻이다. 옛날 [[동양]]에는 치아가 많으면 더 존귀하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1천 년쯤 뒤 [[송나라]] 시대에 쓰여진 [[관상학]] 서적 마의상법(麻衣相法)에서는 '치아가 38개면 [[왕]]이나 [[제후]]이고, 36개면 [[관료]]나 [[갑부]], 32개인 사람은 [[중인]](中人), 30개는 보통 사람, 28개는 [[흙수저|하층의 가난한 부류]]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시대 차이가 상당히 나지만, 치아가 많을수록 현명하고 존귀하다는 인식이 하루아침에 나타났을 리는 없으니 참고할 만하다. 참고로 따로 질환이 없다면 일반인의 치아 갯수는 [[사랑니]]까지 포함해 32개다.] 유리와 탈해가 각각 [[떡]]을 깨물어 잇자국의 수를 세니 '잇금'이 많은 남해 차차웅의 아들 [[유리 이사금]]에게 왕을 양보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8세기 [[통일신라]] 사람인 김대문이 굳이 이 용어의 유래를 따로 설명해야 했다는 것은, 초기 신라의 호칭이던 이사금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수백 년 지난 통일신라 시점에선 이미 의미를 불명확하게 여기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사금은 [[군주]]를 뜻하는 중세 국어의 낱말 '님금'의 기원이며 '님금'이 변하여 현대 국어의 '[[임금]]'이 되었다는 설이 정설이다. 이 설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실학자 [[이익(실학자)|이익]]의 《[[성호사설]]》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나오는 오래된 가설이다. >신라 시대에는 이성(異性)을 추숭하여 모두 [[갈문왕]]이라 칭하고, 본종(本宗) 정통은 [[마립간]]이라 칭했는데, 갈(葛)과 마(麻)는 질대(絰帶)를 말한 것이다. 《주례》에 상고해 보면, 왕은 제후를 위하여 시복(緦服)을 입는데 최변(衰弁)에 질(絰)을 더하였다. 즉 동성(同姓)에는 마(麻)로 하고, 이성에는 갈로 하여 갈질왕(葛絰王)이라 하였으니, 이는 본종과 구별한 것이다. > >이로 미루어 본다면, 신라 시대에도 처음부터 왕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의 마립간·이사금은 이른바 속어(俗語)로서, 지금의 이금왕(尼今王)과 같으니 사필(史筆)에서는 비록 왕이라 일컬어도 가하겠다. >---- >《성호사설》 제23권 경사문-갈문왕 >《삼국사기》에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가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 하였는데 유리의 이가 많으므로 그이를 왕으로 세우고 이사금이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떡을 물어 보았다는 말은 아이들의 희롱에 가까운 일이라 고속(古俗)이 비록 질박하다 하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 >아래 문장에 또, "박씨와 석씨 사람 중 손윗사람으로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이가 많다는 것은 곧 나이가 많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전설이 이미 오랬기에 나는 이제 그를 따른다. 신라 사람 김대문은 "이사금은 곧 방언으로서 이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지금 풍속에 군왕의 글자를 [[임금|니음금(尼音今)]]이라 하니, 대개 신라어가 변전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잇금(齒叱今)으로 썼다.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고이(考異) 이사금의 '금(今)'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낱말로 추측된다. '금'은 일본어 가미(神) 또는 기미(君)와 동원어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尼師'를 일본어 누시(主)와 동원어라 보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김씨]] 성이 많은 것도 금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보는 설이 존재한다. 쇠 금([[金]])이 과거 신라에서 임금을 일컬었던 이제 금([[今]]) 또는 신을 일컫는 순우리말인 검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마치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이 왕([[王]])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조선시대 왕의 호칭이었던 상감(上監)과 높은 관리들을 부르는 말인 [[대감]](大監), 나이 든 남자 어른을 높여 부르는 말인 [[영감]](令監) 등에 있는 '볼 감([[監]])'자도 단순히 '보다'라는 뜻이 아닌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단지 한자음을 빌린 것으로, 같은 맥락의 단어라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노사화현(奴斯火縣)과 자인현(慈仁縣)이 대응된다는 점에서 착안해 "자비롭다"는 뜻의 [[고대 한국어]] 어휘를 *nese로 재구하고, 이사금을 "자비로운 군주"의 의미로 풀이하기도 한다. 더불어 [[단군왕검]]의 왕검(王儉)을 '임금'의 이두식 표현으로 보아 이사금과 관련된 단어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