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부 (문단 편집) === 병부령에 임명 === [[진흥왕]] 2년(541년)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兵部令)에 취임해 명실상부한 군부의 정점에 올랐다. 7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성년인 18세(551년)가 될 때까지 약 11년간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따라서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한 인물도 실질적으로 지소태후였다.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법흥왕대에는 법흥왕 본인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인지 병부령이 공석인 때가 많았다. 법흥왕 사후 진흥왕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지소태후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명장 이사부를 병부령에 앉혀 국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흥왕의 섭정 시기 동안 이사부는 군권을 바탕으로 국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척경비]]에 '과인(진흥왕)이 어릴 때 왕위에 올라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고 기록된 것에도 이같은 상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조정에서 이사부의 권력이 너무나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54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사부는 여전히 중용되었으며, 도살성, 금현성 전투 등 진흥왕이 친정을 행사하기 전까지 국방에서 커다란 업적을 여럿 남긴다. 진흥왕 6년, 이사부는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건의했는데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편찬을 명했고[* 거칠부는 한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승려]] 경력이 있고 소싯적에 신라와 고구려 등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많은 문사들과 인맥을 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서 편찬에는 이사부 본인이나 다른 자들보다 적임자였다.] 거칠부가 쓴 게 신라 최초의 [[정사(역사)|정사]](正史) [[국사]](國史)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정말로 "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논란은 백제에서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지었다는 "[[서기]]"에도 적용된다. 원문에는 단순히 "국사를 짓도록 하였다", 즉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는 식으로 풀이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연이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인용했다고 전하는 "국사(國史)"라는 문헌 또한 실상은 "[[구삼국사]]"나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지었다는 "국사"와는 별개의 책일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