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겸 (문단 편집) === 충청도의 의병장 === 이산겸은 [[이지함]]의 서자였다. 실록에 따르면, 이지함이 처가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가족들을 데리고 섬으로 들어가 길러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이지함에게는 적자 셋과 서자 하나가 있었는데, 큰 아들 산두(山斗)는 거인(據仁)을 낳은 뒤 사망했고, 둘째 아들 산휘(山輝)는 호랑이에 물려 죽었으며, 셋째 아들 산룡(山龍)은 열두살 때 역질(疫疾)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지함의 자식들 중 장성한 이는 서자 이산겸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이산겸이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어 취조받았을 때, 이산겸의 동생 이산두도 끌려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본명은 천두(天斗)였는데 산겸의 동생인 연고로 산두라 불리웠습니다. 뜻이 같지 않으면 부자 사이에도 모르는 것인데 비록 동생이라 하더라도 다른 집에서 사니 그 가운데 있었던 일은 형세상 알기 어렵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 27년 2월 14일자 기사 이에 대해 [[류성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산두는 이미 죽었는데 산겸의 동생으로 와서 갇힌 자도 산두라 하니 심히 괴이합니다. >---- >선조실록 선조 27년 2월 27일자 기사 이산겸은 보령에서 살다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6월 의병장 [[조헌]]의 막하에 들어가 진중에서 종사하다가 조헌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여 평택(平澤)·진위(振威) 사이에 주둔했다. 그해 11월, 사간원이 의병의 활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이산겸을 언급했다. >변란이 생긴 이후로 인심이 흩어졌는데 의사(義士)들이 한번 창의(倡義)하자 군민(軍民)이 향응하여 국가가 오늘날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의병들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피난하여 자기만을 보호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관가(官家)에 유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의기를 분발하고 힘을 다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적개심(敵愾心)을 발휘한 자이겠습니까. 근래 조그만 폐단 때문에 조정에서 숭장(崇奬)하는 뜻이 점차 처음만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기(士氣)를 붙잡아 세우는 도리이겠습니까.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은 강개스럽고 의기가 있으니 의병들이 그를 장수로 삼은 것은 반드시 중망(衆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변사에서 허통(許通)하자고 아뢴 것은 가장(嘉奬)하는 뜻만이 아니고 그 명칭을 중하게 여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의병을 모집하여 종군(從軍)한 자 및 계본(啓本)을 가지고 간 자들은 모두 허통하였는데 유독 이 사람에게만 아직껏 은명(恩命)을 아끼고 있으니 참으로 근왕(勤王)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사기가 꺾일까 두렵습니다. 대적을 멸하지 못한 지금 가벼운 일이 아니니 해조의 공사(公事)대로 시행하소서. >---- >선조실록 선조 25년 11월 16일자 기사 선조 26년(1593년) 11월, 류성룡은 명나라 장군 왕필적(王必迪)이 이산겸을 호평했다며 이산겸을 중국 사신단에 대동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지함(李之菡)의 서자(庶子) 산겸(山謙)이 충청도 의병장이 되어 2월경에 개성부(開城府)에 왔다가 왕필적(王必迪)·오유충(吳惟忠)을 만났는데, 왕(王)이 신(臣)에게 서간(書簡)보내어 산겸을 크게 칭찬하기를 ‘어떻게 이처럼 간담(肝膽)이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사람을 배양해냈는가?’ 했고, 신도 만났는데 극력 강화의 불가함을 말했었습니다. 이는 좋은 사람입니다. 신은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 >선조실록 선조 26년 11월 21일자 기사 그러나 이산겸은 의병을 모아놓고는 일본군과 한 차례 교전을 하지 않은 채 병량과 무기를 모아놓기만 해 세간의 의심을 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