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해 (문단 편집) == 생애 == [[고려]] 말 유학자인 [[이색(고려)|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해의 고조부이자 이색의 증손자인 [[이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 사촌 관계이다. 아버지 이지번은 청풍현감을 지냈고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함]]이 숙부이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본다. 야담에는 이지번과 이지함의 부친이 죽고 묏자리를 알아보던 중 지관이 말하기를 "이 자리는 장남 이지번의 [[후손]]은 부귀영화를 누리나 이지함의 후손은 단명하고 끊긴다"는 얘기를 했다. 이 때 이지함이 나서서 자기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그대로 강행했다. 훗날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정승]]까지 올라 영달했으나 이지함의 아들들은 [[요절]]하거나 호환으로 죽고 유일하게 오래 산 아들 이산겸도 임진왜란 중 모함을 받아 죽었다. 토정비결의 저자라면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려 했을 것이지만 묏자리 잘못 써서 그렇다는 것은 [[투탕카멘의 저주]] 같이 과장된 것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 일화에 따르면 숙부 이지함이 한양에 온 이덕형을 보고 판서이던 조카를 찾아가 불문곡직 사위로 맞아들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숙부가 지인지감이 있는 것을 아는 이산해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실제로도 인재라 장인인 이산해도 만족했겠지만 이덕형은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당할 때 북인의 영수인 장인과는 달리 남인이 된다. 물론 이덕형은 남인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당색이 약한 무당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참고로 오성 이항복의 장인은 [[임진왜란]]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유명한 [[권율]] 장군이다. 근데 사실 권율은 원래 쭉 문신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전세가 위급해지자 사람이 없어서 급하게 장수를 시켰던 건데 [[이치전투]]와 [[행주대첩]]에서의 놀라운 활약으로 정식 장군으로 임명되다 못해 무려 조선 전체에서 제일 높은 장군인 [[도원수]]가 된 엄청난 케이스이다. 전쟁이 아니면 나올 수도 없고, 전쟁 중에도 보통 거의 안 나오는 극도로 드문 케이스. ]인데 이산해의 둘째 딸이 이덕형의 부인이었고 [[임진왜란]] 중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동갑의 사촌 형제인 이산보는 이산해와 달리 [[서인]]이었는데 [[이이(조선)|이이]]와 친구였기 때문. 게다가 사위 이덕형은 [[남인]]이 된다.[* 이는 오성 이항복도 유사하다. 그의 처가 안동 권씨 집안은 따지고 보면 동인인데, 이항복은 서인이다. 물론 장인 권율은 벼슬을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한만큼 동인으로 당파싸움에 참여한 적은 없고, 젊을때부터 벼슬을 한 권율의 부친(권철)과 친형들은 큰 싸움까지는 안 했어도 어느정도 동인의 활동을 했었다. 후대의 권씨 집안은 일부는 동인 중 북인으로도 들어가고 남인으로도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그의 부친이 [[산해관]]에서 그를 잉태하는 [[태몽]]을 꾸어 이름을 산해라 지었다고 한다. 이산해의 모친이 남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동안 [[임신]]을 해버려서 집안에서는 [[불륜]]을 했다고 난리가 났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어느날 남편과 동침하는 꿈을 꾼 뒤 태기가 생겼다며 거듭 부인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산해의 부친은 아내가 꿈에서 자신과 동침한 이야기를 듣자 자신도 그 날 산해관에서 아내와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며 놀랐고 부인은 누명을 벗었다. 이산해의 부친이 귀국하기 전까지 집안에서 유일하게 이산해의 모친을 옹호해준 것이 숙부 이지함이었다.[* <[[해동총화]]>에서는 이지함이 형수와 불륜을 해서 이산해를 낳았다는 암시를 남긴다. 물론 해동총화는 지어낸 만화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자.]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이산해의 총명함이 궁궐에 전해져 [[명종(조선)|명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5살 때에 시를 지었고 6살 때에는 장문의 글을 지어 신동으로 알려졌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화를 입게 되자 고향인 [[충청도]] [[보령시|보령]]으로 이주하였다.[* [[윤원형]]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사위삼으려 했으나 [[정난정]]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버지 이지번이 거절했다.] 숙부 이지함이 직접 글을 가르치다가 남명 [[조식(조선)|조식]]에게 보내고 이어 [[이황]]의 서원에도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을 배우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량]]과 [[이감]]의 탄핵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동서 분당 때 동인에 가담하고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반복해서 역임하다가 1578년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와 그의 조카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후 병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다시 이조판서가 됐으나 서인들의 반발로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겸직하였다. 우찬성, 좌찬성, 대제학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공신#광국공신(光國功臣)|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1591년 음력 1월에 [[정철]]이 [[류성룡]]과 더불어 [[세자]] 책봉을 건의하려 했으나 이 때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 책봉 건의안을 올리는게 자꾸 늦어졌는데 갑자기 음력 1월 29일에 건의안을 올리기로 했던 부제학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전임되었고 이 바람에 세자 책봉 건의안은 공중 분해가 되어버린다.[* <송강연보> 등의 문집에는 정철이 [[선조(조선)|선조]] 앞에서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노여움을 샀다고 나오는데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정철이 탄핵당한 죄목 중에도 세자 책봉과 관련된 말은 단 1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정철 또한 좌의정 지위에서 물러나고 영돈녕부사로 체직되었다가 파당을 만들어 명경, 사대부들을 모함한 죄로 [[유배]]당한다. 급작스럽게 전개된 이 사건을 보면 정철이 자행한 [[기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치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동인(조선)|동인]]이 집권했는데 서인 세력 처리 과정에서 온건파였던 류성룡 등과는 달리 이산해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이로 인해 결국 동인은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당된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뒤 영돈녕부사, 영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함락되자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었으며 본인은 [[평해군|평해]]로 유배보내졌다. 영의정은 최흥원, 좌의정은 [[윤두수]], 우의정은 [[유홍]]이 임명되었다가 이후 다시 복귀한다. 1609년 병이 들어 [[광해군]]이 [[이이첨]]을 문병보내기도 하고 [[어의#s-1]]까지 내려줬으나 1609년 음력 8월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