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작가) (문단 편집) === 금홍이 === 회사를 그만둔 후 이상은 요양차 갔던 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된다. 요양에서 돌아온 이상은 [[종로구|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금홍을 불러 그녀를 마담 자리에 앉힌 후 금홍과 동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방은 잘 되지 않았고 심심해진 금홍이는 외박을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ooniebaby&logNo=110158273374|이상과 금홍과 변동림]]] 그러자 이상은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났냐며 금홍을 몰아세웠고, 이에 금홍은 가출을 하거나 [[데이트 폭력|이상을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였는데 이를 이상은 매우 두려워했던 듯하다.[* 하루 나는 제목없이(느닷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봉별기(逢別記)>.] 결국 금홍은 몇 번의 가출 끝에 이상의 집을 완전히 나가 버리고, 다방 <제비>도 그와 함께 폐업한다. 그럼에도 금홍을 퍽 사랑했는지 '이런시'에서 금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이런시 - 이상 > >역사(役事)[* 규모 큰 토목·건축 공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 일꾼]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 한[* 큰]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도다. >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보면 알겠지만 다른 지방에서 기생으로 일하는 금홍의 필연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해석이다. 이상의 다른 문학 작품을 살펴보았을 때, 자아 합일에 대한 갈등을 그려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시풍을 비판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상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현수(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상의 시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 20여 년간 이상 시를 연구해 온 입장이지만, 석사과정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이 내놓는 이상 연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고 '맞다' '틀리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 시의) 해석은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의 시는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것이다." 박 교수는 "이상 관련 학술대회를 하다보면 길을 가다 들어와서 질문하는 사람들도 가끔씩 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도 확실히 '아닙니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이러한 특징을 지닌 것은 이상 문학밖에 없다"고 전했다. 결국 "이상은 정해진 해석이 없는 작품을 쓴 유일한 문학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 역시 금홍과의 동거 생활에서 얻은 체험들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주인공(이상 자신)은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아내가 [[매춘]]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능력하게 늘어져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중간에 나오는 '연심이'는 금홍의 실제 이름이다. 이외에도 이상은 사망 직전인 [[1936년]], 금홍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한 '봉별기(逢別記)'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다. 제비가 폐업한 직후 이상은 다방 제비에 드나들던 문학가들의 추천으로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명사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박태원(소설가)|박태원]]의 신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하융(河戎)' 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구인회에서 그는 특히 같은 병을 앓고 있던 소설가 [[김유정(소설가)|김유정]]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심지어는 동반자살을 권유하기도 했다.(김유정의 거절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김유정이 병사한 지 18일 후, 이상도 사망했다.] 한편 이상은 금홍과 헤어지고 다방 <제비>가 망한 후에도 1935년에 다시 인사동에 <쓰루(つる,학鶴)>, 종로 1가에 <[[69]]>를 차례로 개업했다가 남에게 넘기고, 그러고도 다시 명동에 <무기(むぎ)>란 다방을 열었으나 이것도 망한다.[* 69다방에 있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간판까지 걸고 개업날까지 받아놨는데 아는 사람들은 킬킬대면서, 혹은 민망해하면서 지나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때려서 영업 허가가 취소됐는데, 이상은 "[[69(성적은어)|그걸]] 누가 말해줘야 알았냐"하고 고소해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이런 성적인 은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어서 69라 적힌 간판을 보고 대부분 천천히라는 뜻의 일본어 [[윳쿠리|ゆっくり]]를 말하는 걸로 알았다고 한다.] 경영에 있어서는 [[천재]]가 아니었던 듯. 오죽했으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냐고 하소연했을 정도.[*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 '날개(1936)' 중에서] 결국 그 사이 가족들은 빈민촌으로 이사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