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수 (문단 편집) === 정치 경력 === 서울 중랑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민정당의 [[이순재]][* 우리가 아는 그 이순재 맞다.]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 [[평화민주당]] 대변인과 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1988년 [[노무현]], [[이해찬]] 국회의원과 함께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92년 서울 중랑구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14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이순재]]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93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과 관권선거를 폭로한 한준수 군수 주임변호사를 지냈으며, 1995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상임이사로 활동했다. 1996년 서울 중랑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김철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지방자치위원장과 노동위원장을 지냈으며, 1997년 4월 국회 한보그룹비리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여당이 된 후, 1999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 제1정책조정위원장을 지냈으며, 2000년 국회 정치구조개혁입법특별위원회 선거법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에도 서울 중랑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김철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선 후 새천년 NHK 사건에 연루되었다. 해당 문서 참고.] 그 후 새천년민주당 제1정책조정위원장, 국회 한빛은행대출관련의혹사건등의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 '인권법제정 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1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원내총무로서 국가인권위원회법,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 이른바 개혁3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상가임대차보호법, 고엽제후유증관련법, 시국사건 관련 교원임용제외체용에 관한 특별법, 의료보험법, 근로자복지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개정, 근로기준법개정(모성보호관련조항), 고용보호법개정(모성보호관련조항) 등의 이른바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데 여야 협의를 이끌어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예비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당내 결선에서 [[김민석(정치인)|김민석]]에게 아슬아슬하게 패하였다. 패하자마자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며, 김민석의 승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상수의 인품에 감동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때 차라리 김민석 대신에 이상수가 서울시장 후보가 되는 것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민석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에 패배한 후 막대한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어떻게 자기 무덤을 파게 되었는지는 설명은 생략한다.] 2002년말,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무본부장을 맡았다. 대선을 치르다보면 돈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깨끗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죽하면 노무현 후보가 "대선 때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했을까...] 남들 다 마다하는 악역을 너무 쉽게 맡은 거 아니냐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도 동지의 대통령 당선과 자기 장래의 정치적 커리어 전체를 맞바꾸는 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03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등과 함께 창당 강경파의 입장을 취하였고, [[권노갑]]을 비롯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찍혔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창당한 열린우리당에서는 총무위원장과 지구당창당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004년 2월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모금한 기업후원금 가운데 [[한화그룹]] 10억, [[금호아시아나그룹|금호그룹]] 6억의 선거후원금에 대해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은 점, [[SK그룹]] 10억, [[현대자동차그룹]] 6억 6천만원의 선거후원금에 대한 영수증을 해당기업 임직원 명의로 발급한 점 등이 문제된 것이었다.[* 이때 검찰에서 이상수를 구속 기소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 안대희였다.] 구속수감에 따른 부담으로 이상수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한다. 지역구는 이상수의 추천으로 그의 보좌관 출신인 이화영이 물려받아 당선된다. 결국 그는 2004년 7월 항소심 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과거 관행이었다는 점에서 억울한 점이 있다.” 하였고, 새천년민주당 선거캠프가 현대자동차에서 임직원 명의로 받은 6억 6천만원에 대해서는 “(이상수)피고인이 편법 처리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8월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서 초빙연구원으로 연수 생활을 시작하여 4개월여간 미국에 머물렀다. 200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 조치 되었으며, 김기석 의원이 1년 만에 짤려서 2005년 10월 [[부천시 원미구 갑]]에서 [[2005년 재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이때 서울 중랑 갑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상수의 경쟁자였던 [[이순재]]가 이상수의 선거 후원회장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이 지역구는 19대 총선에 들어서야 민주당의 텃밭이 된다.] 2006년 2월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동부 장관 임명 당시 노동계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한나라당에서는 물론 '노 대통령의 보은인사'라며 비판하였음.], 이후 그의 주도로 제정된 비정규직법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히려 조기 해직되는 부작용이 발생하자 노동계의 비판을 받았다. 2008년 4월, 서울 중랑구에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하였으나,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심사 과정에서 당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형 이상 형 확정자 공천배제' 방침에 따라 당 후보로 공천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탈당 후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인 [[유정현(방송인)|유정현]]에게 밀려 낙선했다.[* 민주당의 임성락 후보와 표를 나눈 것이 패인으로 분석되었다.] 2008년 5월 30일, 통합민주당에 복당하였다. 비록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개인적 비리가 아니라 당을 위해 희생됐던 측면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당시 한화갑도 통합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다. 이에 분노한 한화갑은 2010년에 [[평화민주당(2010년)|평화민주당]]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한 바 있고, 2년 후에는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그 후 7월 통합민주당 전당대회에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통합당]] 공천을 신청했지만 [[서영교]]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을 선언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국회 입성에 또 다시 실패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우성의 대표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015년 통상임금 소송에서 노동계 [[중간계투|구원투수]]로 등판하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박지순 교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하여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