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재 (문단 편집) === 국권침탈 시기 ===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쫓겨가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하자 박정양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갑오개혁]] 때 이상재는 학무국장 겸 학무아문 참의로서 '신교육령'을 반포시켰으나 갑오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1895년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뤼순]]항과 [[요동]] 지배권을 뺏기자 고종의 마음이 러시아로 기울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급진 개화파들은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지만 이상재를 비롯한 온건 개화파들은 수구당과 손을 잡고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힘을 보탠다. 그는 이 때 [[대한제국 중추원|중추원]] 1등 의관, [[대한제국 의정부|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냈고 1896년 [[독립협회]] 출범 때는 물론 1898년 3월 '만민 공동회'와 10월 '관민 공동회'에 정부 측 인사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꾀하고 있다'는 어용 단체 [[황국협회]]의 무고(익명서 사건)로 [[남궁억]] 등 16명과 함께 1898년 11월 체포되었다. 이 때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 가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아들 이승인과 함께 3년형을 사는 동안 [[개신교]]로 개종했다. 이후 이승인이 옥 중에서 사망하는데 이 때 이승만이 준 [[성경]]을 읽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에 원한맺힌 마음을 푼다. 이승만과는 이 때부터 사제 지간이 됐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풀려나 곧바로 낙향한 그는 고향에 초갓집 교회를 열었고 '조선 기독교 청년회([[YMCA]])'에도 참여해 [[기독교]] 운동에 매진한다. 1905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이 방한하자 맞이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미국에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미서전쟁]]의 전리품인 [[필리핀]]의 지배와 북[[태평양]] 제해권을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본과 동맹한 상태였다. [[을사조약]]을 지켜본 그는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잠시 의정부 참찬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이 때 자신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스승이면서 선배인 박정양의 죽음을 맞아 큰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1906년 조선에 은혜를 입은 [[일본인]] [[소다 가이치]]를 기독교인이 되도록 전도하고 소다 가이치는 훗날 조선 아이들을 돌보고 조선의 독립 운동을 도우며 미쳐가는 자국에 맞서 조국의 악행을 회개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