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재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1910년 [[경술국치]] 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 제국|일제]] 치하가 되자 관직을 버리지 않은 자들은 과거 친일 개화파였든 수구파였든 누구든 [[친일파]]로 변질되는데 이상재는 양심 인사로서 일체의 관직을 내려놓고 은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계몽]] 활동에 나서 교육자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상재는 '민족 대표 33인'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다. 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었고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도했으며 1923년 현재의 [[보이스카우트]] 전신(前身)격인 '소년 연합 척후대'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부임하였으나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항일운동단체였던 [[신간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한달 뒤인 1927년 3월,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열렸는데, 4남 중 3남이 모두 이상재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이승간, 이승인, 이승윤, 이승준의 4남을 낳았는데, 1870년 생인 장남 이승간은 1895년에 사망했고, 1872년생인 차남 이승인은 1908년에 사망, 1885년 생인 3남 이승윤은 1912년에 사망했다. 1887년 생인 막내아들 이승준은 사망년도가 불명이다.],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아들 이승준이 [[상주(장례)|상주]](喪主)를 맡았으며, [[유산(돈)|유산]]으로는 미곡 27가마의 빚을 남겼다고 한다. 묘지는 처음에는 고향인 [[서천군|한산군]] 선여에 장지를 마련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장흥면 삼하리(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했다. 묘비는 [[변영로]]가 직접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