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상재 (문단 편집) == 일화들 == *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양기탁]] 선생과는 국내 애국 계몽, 실력 양성 부분에서 많이 겹친다. 1896년 이상재 선생이 [[독립협회]]에 정부 측 인사로 참여했을 당시 양기탁 선생은 사회에 나온지 이제야 막 초년이 되던 분이었고, 1922년 이상재 선생 말년의 [[민립대학설립운동]] 시 양기탁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에 모인 성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 [[이승만]]이 옥중에서 전도한 바 있고 이승만과 사제 지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후에 이승만이 대통령 재임 때 1956년 공보처를 통해 '월남 이상재 선생 약전(略典)' 이라는 유고집을 발간했다. * 이전부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1920년 [[전국체육대회|전조선야구대회]]에서 직접 [[시구(야구)|시구]]자로 [[http://www.inven.co.kr/mobile/board/powerbbs.php?come_idx=2097&my=chu&p=3&l=819499|나서기도 했다]]. 남아있는 기록들 중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구라고 한다.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렸다. * [[한반도]] 최초의 [[라디오]] 방송의 주인공이다. 1924년 <[[조선일보]]>의 사주가 [[송병준]]에서 [[신석우]]로 바뀌며 홍보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을 기획하면서 이뤄진 일이다. * 처음 [[박정양]]의 식객으로 들어갔을 때 박정양의 집에는 이상재 이외에도 많은 식객들이 박정양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순번을 기다리다간 언제 박정양을 만나볼지 알 수가 없어 꾀를 냈는데 그것은 바로 일부러 색이 다른 [[버선]]을 신어 눈에 띄는 행동을 해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상재의 계획대로 짝짝이 버선을 신고 다니자 집안 하인들 사이에서 이상재는 짝짝이 버선을 신은 이상한 식객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들은 박정양은 그 이유를 궁금히 여겨 이상재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자, 그 재치에 감탄하여 그 때부터 곁에 두었다고 한다. * 그가 박정양의 식객으로 있을 때였다. 밥을 가져다 주는 여종에게 "생일날에 식사 1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서럽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종은 박정양의 아내에게 "어떤 식객이 그런 소리를 하더라"라고 보고를 했고 박정양의 아내는 후하게 한 상 차려 줄 것을 명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른 여종이 들어오자 같은 소리를 해서 다시 1끼 잘 먹고 다시 며칠 후 다른 여종에게 같은 소리를 해서 또 잘 먹었다. 이 일을 알게된 박정양이 이상재에게 "자네는 1년에 생일이 도대체 몇 번이나 되는가?"라고 묻자 '''"[[다다익선|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라고 했다. *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을 때 사모관대를 그대로 착용하고 길거리를 다녔는데 이를 본 아이들이 너무 신기했는지 몰려들어서 마구 돌을 던졌다. 미국 경찰들은 외국 [[외교관]]에게 위해를 끼친 죄로 아이들을 모조리 체포했는데 이상재는 '''[[경찰서]]로 일부러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고 이에 미국 정가에서 조선에 대한 호의적인 이야기가 많이 퍼졌다. 한 역사 수필가는 미국에 가서 꼬마였던 시절 직접 이상재를 따라가며 구경했던 노파를 만났었는데 [[갓(모자)|말총 모자(Horse-tail hat)]]가 신기했다며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만큼 흥미진진한 구경이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 미국에 갔을 때 [[청나라]] 공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볼 일이 있으면 무조건 청나라 [[공사관]]에 먼저 와서 보고를 하라"고 억지를 부리자 논리적으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웃기게도 [[강화도 조약]] 체결 전 일본은 청나라에 이 일을 슬쩍 떠보았는데 청나라의 총리 아문은(지금의 [[외교부]]에 해당된다.) "조선이 우리의 조공국이나 '''내정과 외교는 자유다.'''"라고 대답했다.] * [[미국인]]들이 [[스테이크]]를 대접하자 썰어달라고 하고는 젓가락을 꺼내서 집어먹었다고 한다. * 외국어 학교를 설립할 적에 일본이 "[[영어]]든 뭐든 [[외국어]] 교사는 무조건 일본인을 기용하라"고 억지를 부렸는데, 이상재는 '''"윽 자 발음도 못하는 놈들이 어디서 개소리냐?"'''라고 호통을 쳐서 일축했다. * 젊은 시절 [[김홍집]]과의 대담에서 김홍집이 "전국 민심이 흉흉하니 조선 8도를 대표해서 감사 8명을 잡아들이면 민심이 풀리지 않을까"하고 묻자 이에 답하기를, "전국 8도에서 8명까지 잡아들일 것까지 없고 단 3명만 잡으면 민심이 잡힌다"라고 했다. 김홍집이 그 3명이 누구냐고 되묻자 "그 3명은 바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 [[삼정승]]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나누던 김홍집이 바로 당시의 영의정이었다. * 서양 문물이 들어와 많은 당시 조선인들이 신기해하던 와중에 [[비누]]를 전달받았는데 이상재가 칼로 비누를 반으로 잘라먹어버리자 모두들 "그건 먹는게 아니고 씻는데 쓰는 비누"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게 비누인 줄 아외다. 그러나 속은 더러운데 겉만 깨끗한들 무슨 소용이오? 먼저 속부터 깨끗하게 씻으려 그런 거요."''' *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에게 올라온 온갖 청탁 서류들과 뇌물들을 고종의 면전에서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우냐!"라고 일갈하며 몽땅 난로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직후 용서를 빌었고, 이에 고종은 선선히 용서했다. * [[일본]]에 있을 때 한 [[포병]] 부대에서 일본인 [[장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때마침 그 장교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이상재는 이렇게 말했다. '''"그까짓 감기는 대포로 못 쏘아 잡습니까?"'''[* [[러일전쟁]]을 비꼬아 말한 것.] *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인사들을 보고는[* [[야사(역사)|야사]]에 따라 [[이완용]]이나 [[송병준]]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제 그만 [[도쿄도|동경]]에나 가서 사시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어째서냐고 묻자, '''"대감이 조선에 살아서 조선이 망했으니 일본에 가서 살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니오?"'''라고 일침을 날렸다. * 이상재의 자택을 방문한 일본 순사가 문 앞에서 "'''[[이리오너라]]~!'''"라고 말하자 이상재는 "'''오냐 나간다!'''"라고 응수해 황당해한 순사가 "어찌 반말로 답할 수 있는가?"라며 따지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당신이 먼저 반말로 말했으니 당연히 나도 반말로 말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 "이리 오너라"는 양반집에 들어갈 때 문지기 역할의 하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멘트였다. 양반집 출신인 이상재로서는 "이리 오너라~"는 듣기 거북했을 수 있겠다. *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재봉틀을 도둑맞은 것을 보고 울었다. 당시 재봉틀은 그야말로 고가의 귀중품이라 도난당하기 쉬운 물품 중 하나였는데 이를 본 그가 며느리에게 한 말: '''"아가, 너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도 울지를 않더니만 재봉틀을 도둑맞은 걸로 우는게냐?"''' * [[섹드립]]에도 조예(?)가 있었던 듯하다. 문학가 [[변영로]]가 젊은 시절에 학교 수업을 제끼고 [[종로]]에 놀러나갔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변정상 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변정상은 변영로의 부친인데 아버지 이름을 불러서 놀란 변영로가 뒤를 돌아보니 이상재가 웃으며 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불렀던 게 불쾌해진[* 당시만 해도 조선 시대의 예법이 좀 남아 있어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현대에조차도 격식차려 부를 때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데 조선이 갓 망한 상태에서야 어련하겠는가. 게다가 본인 이름도 아니라 아버지 이름이니 더더욱.]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선생님. 노망이 나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도 구별 못하시다뇨. 또 아무리 제 아버지와 친하시다고 하지만 길에서 남의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십니까?"라며 따지자 이상재 왈, "이놈아! 네가 '''[[정자(생물)|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그 뒤의 말 역시 압권, "그럼 너는 대관절 누구의 씨더냐? 그것부터 말해보아라!"[* 100년이 훌쩍 지난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럽]]에서 팔고 있는 [[기아 씨드]]는 'C'eed로 표기하는데, 이거 역시 'S'eed라고 표기하면 같은 이유로 "정자"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 * 일본에 갔을 적에는 일본인들이 [[대포]]나 [[기관총]]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는데 이상재는 한 마디로 그들을 입다물게 했다. '''"과연 대일본제국이 문명한 나라임을 알겠소이다. 다만 [[성경]]에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태평양 전쟁|그것이 걱정이 되는구려.]]"''' * [[3.1 운동]] 이후 배후 조종 혐의로 투옥되어 서슬퍼런 일본 검사에게 심문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더니 "손바닥을 붙여 달라"고 말했다. 검사가 긴가민가 하며 손바닥을 붙여 주자 이상재는 냉큼 손을 떼면서 일갈한다. "보시오. 억지로 붙인 건 떨어지는 게 순리라니까. '''[[조선]]이랑 [[일본]]도 그래.'''" * 3.1 운동에 연루되어 일본인 고문관에게 취조를 당했을 때도 그는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마구 친다더라. 이 늙은이도 때려치거든 쳐 보거라"'''라며 고문관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는 강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고문관은 자신의 노부(老父)를 생각하여 이상재를 더 이상 고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 3.1 운동 이후 출옥하게 되자 사람들이 "그간 옥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럼 네놈들은 바깥에서 편하게 지냈나 보지?"라고 호통치며 응수하셨다. 일제 탄압에 당하는 건 옥중이나 밖이나 다름없다는 의미. 참으로 비범하시다. * 3.1 운동 이후 일본의 정치가 [[오자키 유키오]]가 찾아오자 이상재는 집 뒤의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그를 맞이하였다. 뒤이어 오자키가 "일본과 조선은 부부와 같은데, [[일본 제국|남편]]이 좀 잘못했다고 너무 심하게 [[3.1 운동|들고 일어나서는]] 되겠느냐"라는 식의 말로 공격해오자 이상재는 "부부가 화합하는 것은 옳지만 정당하게 맺어진 것이 아닌 '''[[을사조약|폭력]]으로 [[경술국치|맺어졌으니]] [[한국 독립운동|당연히 들고 일어날 수 밖에 없다]]'''"로 응수해 오자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후 오자키는 돌아가면서 이상재를 '조선 제 1의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 *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인 [[미와 와사부로]]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게 아니다. 상대를 적절히 존대해 주면서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대하면 수사 대상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와 와사부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수사하려던 [[경찰]]이란 뜻.] 물론 이상재는 미와 와사부로에게 "사람 좀 작작 잡아가라"고 호통을 쳤다. *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당대 최고의 [[독설가]]라 할 만한 인물이자 [[언어유희]]에도 뛰어났다. 특히 [[개나리]]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하다. 언젠가 이상재가 연설을 하러 갔는데 조선인 순사들과 친일파들이 잔뜩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개나리들이 만발하였구나!"'''하는 말을 했는데 군중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어깨에 힘주며 거들먹 거리기에 '''나리라 불러줬지만 실상은 왜놈의 앞잡이니 개새끼나 다름없어 개나리'''였던 것이다. 이상재가 이를 이용하여 언어유희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판본의 차이고 실제로는 [[순사]]들만 나온다. 이 때 순사들은 영문도 모른채 군중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었다고 한다.'''] 상술한 에피소드도 그렇고 유머감각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순사들과 친일파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왜 개나리가 만발했나고 물어보자 이상재가 여기에 참나으리는 없고 개나으리뿐이잖소?라며 대꾸했다는 버전도 있다.] * 빚과 가난으로 힘들어 하던 이상재에게 누군가 [[땔감]]이나 하라고 두둑한 돈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온 한 학생이 빈곤을 호소하자 냉큼 봉투째 들려 보내고는 "그러시면 어떡하냐"고 힐난하는 사람에게 "내 형편을 아는 놈이 또 갖다 주겠지?"하며 [[송아지]] 눈을 떠서 끝내 주머니를 털게 만들었다고 한다. *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청년''' 이상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청년들과도 허물 없이 담소하는 것을 즐겼다. 이를 두고 주변에서 그렇게 젊은이들에게 허물없이 대하면 선생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않겠냐고 염려하자 선생은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하는 것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틀딱충]] 문서에서 관련 어록에도 등재되어 있는 명언이다.] * 독립운동가 이원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이 여사 어머니의 동생)으로, [[1948 런던 올림픽]]의 대표팀 고문 및 대한민국의 IOC 가입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동안 미국에서 살다 귀국 후 1993년에 10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노소동락(老少同樂)을 주장하여 청년들과 경주하거나 바둑·장기 두는 것을 좋아했다. 학생들끼리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을 보면 반드시 훈수하기를 좋아했고 훈수대로 두지 않고 질듯한 사람에게는 자리를 비키게 하여 대신 이겨주고 즐거운 듯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모습이 마치 홍안소년(紅顔少年)처럼 보였다고 한다.[*a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 新太陽社, p. 72-74] * 1911년 초봄, 일본 YMCA가 월남 선생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한일 양국의 교인간 친목을 표방하였으나 그 내막에 있어서는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게 하려는 정치적 흉계가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에 건너간 월남 선생 일행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명승고적을 두루 시찰하고 어느날 저녁, 총리대신이 베푸는 만찬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만찬회에는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대신이 참석했는데 만찬이 끝날 무렵, 총리대신이 가장 평범하고 서민적인 월남에게 소신을 듣기를 청하였다. 이에 응한 월남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a] > 여러분! 일본인들은 일본이 가장 강한 나라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네들은 원하는 모든 것이 성사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하나의 강력한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임금께서 노하시게 되면 일본의 육해군은 눈깜짝하는 사이에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이것을 명심하여 그 임금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일본은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임금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임금이십니다. * 사망 하루 전 두 제자가 문병을 오자 그 제자들에 남긴 말도 참 비범하다. '''"네 이놈들. 너희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하고 구석으로 돌아 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평생 개인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온 이상재였기에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분류:서천군 출신 인물]][[분류:한산 이씨]][[분류:1850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온건개화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일보 관련 인물]][[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독립협회]][[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