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색(고려) (문단 편집) == 생애 == [youtube(qEifIZB0q80)]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이곡이 복주(지금의 안동)에 부임하여 사록참군사(事錄參軍事) 벼슬을 할 때, 영해 지역 토호였던 함창김씨(咸昌金氏) 진사(進士) 김택(金澤)의 딸과 혼인하여 외가가 있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했다. 고려에서 진사시에 합격한 뒤 [[원나라]]에 건너가 원나라 [[국자감]]에서 처음 성리학을 배워서 연구하였고 이후 원나라에서 [[과거 제도|과거]] 시험을 쳐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 전시[* 최종 시험. [[임금]] 앞에서 시험을 침.]에서는 2등[* 이색은 전시에서 1등의 성적을 얻었으나 이색은 원나라인이 아닌 [[외국인]]인 까닭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 1등 합격자는 우계지(牛繼志)이다.]으로 합격했다.[* 당시 원나라의 과거 시험은 이후 명청대처럼 정기적으로(식년시:3년마다 실시, 그외 특별 시험이 종종 있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 시행했고 선발 인원 또한 극소수였다.] 앞서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 [[최승우]] 등도 [[당나라]]에서 급제했다고 하지만 외국인 대상의 [[빈공과]]에 합격한 것이므로 다소 격이 떨어지는데 비해 이색의 전시 2등은 그야말로 [[클라스]]가 다른 어마무시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원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을 이유로 [[귀국]]했다. 고려에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이 [[무신정권]]기의 잔재였던 [[정방]]의 폐지. [[공민왕]] 때 [[토지]] 제도 개혁, [[불교]] 억제 등의 [[상소]]를 올렸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것에 가담했다. 이후 창왕 폐위 때 이성계 일파에게 [[관리]]들의 토지를 빼앗아 분배하자는 토지 [[개혁]]에 반대한다는[* 이색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필 이색의 집안은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토지 소유량이 많은 편인지라 토지 개혁을 진행했다가는 빼앗길 토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은 겹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권문세족 중에서도 성리학을 배우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올라 개혁에 찬성하면 신진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권문세족들도 [[음서]]뿐만 아니라 과거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조준도 권문세가 출신.] 이유로 밀려 [[귀양]]을 갔다가 [[공양왕]] 때 정몽주가 [[정권]]을 잡자 [[부원군]]의 자리를 받아 '한산부원군'이라 불린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찬성하지 않았기에 [[태조(조선)|이성계]]로 인해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도전은 [[스승]]이기도 한 이색에게 냉혹한 태도를 보였고, 자연도(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보내려 했다. 담당 관리가 자연도가 무인도임을 들어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고 하며 암살계획을 짜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으로 [[장흥군|장흥]]으로 유배를 갔고, 후일 사면되어 한산백이 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암살 음모를 저지하고 이색에게 각종 특전과 재물을 내리거나 잔치를 베풀어 최대한 예우하려 했으나 이색은 고려에 지조를 지키려 했고, [[오대산]]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이색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색을 군신이 아닌 친구의 예로 대우하며 불러서 접대했을 때는 떠나가는 이색을 직접 배웅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직접 방문했는데도 "나를 개국 당시 불렀다면 예우를 차려서 자리가 빛났을 텐데, 왜 [[배극렴|말 장수]] 따위에게 일을 시켰습니까?"[* 배극렴이 옥새를 바친 장본인이기에, 이는 이성계의 즉위를 거칠게 비난하며 비웃은 것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이색의 졸기.]같은 폭언을 내뱉어 다혈질인 [[남은]]을 격분하게 만들었고, 남은의 형인 [[남재]]는 넌지시 그의 아들 이종선에게 "공이 광언(狂言)을 내뱉어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화를 입을 것이다"라면서 피신을 권하고 자중할 것을 권했다. 결국 다음 해인 1396년 6월 17일 피서를 가겠다며 여강(驪江,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의 [[신륵사]]로 떠나던 중 배 위에서 [[객사|급사했는데]], 이를 두고 정도전의 독살로 추측하는 시각이 있지만 확실한건 아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죽고 사는 이치를 내 의심하지 않는다.''' >'''死生之理, 吾無疑矣.'''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