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색(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 [[권부]], [[백이정]] 등 6명의 제자다. 이 중의 1명이 [[이조년]]으로 [[이인임]]의 조부.]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 다만 이것은 제자를 칭찬하는 말로 이 말을 정몽주보다 [[학문]]이 뛰어나지 못 했다고 곧이 곧대로 해석해버리면 곤란하다. 물론 정몽주의 학문적 완성도는 이색보다 못 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의 재능)가 없다." 하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듯하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았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승려인 혜근(나옹선사)의 비문과 인각사 무무당기[* 이색의 문집인『목은집』「인각사 무무당기(麟角寺 無無堂記)」 中: "(상략)...불교의 화복인과(禍福因果)의 설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가 있다...(중략)...나는 도대선사 서공(諝公)이 불도를 열심히 믿었기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날로 알려지고, 선행을 부지런히 하였기에 일이 쉽게 풀린 것이라 생각한다...(하략)..." 이는 정몽주와 대조되는 부분인데, 정몽주는「김초가 불교를 훼손한 죄를 사면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서 "...(상략)...신들의 생각으로는 불교를 배척함은 유학자의 떳떳한 도리이므로 예전부터 임금이 따로 두고 논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전하의 관대하신 아량은 하찮고 엉뚱한 자는 용서하실 만한 것이니, 삼가 너그러운 은혜를 베푸시어 한결같이 다 용서하시고 백성에게 믿음을 보이시길 바라나이다."라고 하며 강한 숭유억불의 의지를 드러냈다.]를 써주는 등[* 목은집 권49(목은문고 권14)] 불교와 친하게 지내곤 해서 이후 성리학자들에게 내내 까였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준 대가로 불교계에서 윤필료(붓을 닦은 값)를 주었는데, 사실상 돈 줄 명분이다. 이색이 너무 많이 준다고 거부하자 그 돈으로 [[암자]] 5개를 짓는 등 어마어마하게 후원해준다.] 조선이 숭유억불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 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였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 정도전에게 죽었다.]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이름만으로 천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일단 500년동안 이름 남기기는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