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석(1881) (문단 편집) == 생애 == 이석은 1881년 2월 15일 경상도 청송도호부(현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각지에서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또한 15세의 어린 나이로 총을 메고 의병에 참가했으나 의병진이 해산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1905년 겨울, [[이한구(1870년 9월)|이한구]] 등이 [[경주시|경주]]의 동대산(東大山)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는, 동지를 이끌고 그 의병진에 가담하여 당초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에 발탁되었다. 1907년에는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영덕군|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은 체포당하여 처형되었고 이석은 중도에 되돌아와 화를 면했다. 또한 같은 해 정용기 의병대장이 입암(立岩)에서 전사하니 그의 부친 정환직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자, 그는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 대장마저 [[청하면(포항)|청하]] 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자 의병진은 그 주장(主將)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을 이유로 주장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또다른 주장(主將)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후 [[장기면|장기]]로 진격, 그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광역시|울산]]을 향해 진군하던 중 매복 중이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훗날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기약,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내려가 삼유산(三踰山)아래 도평촌(道坪村)[* 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로 추정됨.]에 은거하고 있던 중 1909년 2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에 성공,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같은 달 14일 순국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