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석규 (문단 편집) == 일생 == 1966년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https://tapain.com/news/article.html?no=5542|#]]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용북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직업훈련원에서 1년간 배워 대우조선(현 [[한화오션]])에 취직하였다. 다소 내성적인 그는 간혹 동료들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했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힘든 조선소 작업에 성실히 임했다. 그러나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1985년부터 1987년까지의 3년은 악몽의 시기였다. 임금은 거의 동결에 가까웠고, 급기야 1987년에는 3만명 중 1만6천명 감원이라는 직격탄까지 맞았다. 기아 임금으로 벼랑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1987년 초, 군 입대를 앞둔 노동자들이 작성한 유인물 수천장이 현장과 기숙사 등지에 뿌려지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측은 부서이동, 파견근무, 해고 등으로 맞섰지만 불붙기 시작한 노동조합 결성 투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위산업체에서 5년 근무하면 군 복무가 면제되기 때문에 한눈 팔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던 노동자들은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석규도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8월 11일에 결성된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회사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협상이 진행되던 22일, 교섭 과정에서 사측의 무성의와 지연작전에 지친 노조 대표는 최초의 요구안에서 몇 걸음 물러나 ‘기본급 2만원 인상, 현장수당 2만원 인상, 가족수당 1만원 신설’ 안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결렬하였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1차로 호텔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백골단에 의해 구타당하며 바닷가로 쫓겨갔고, 2차 호텔 진입 때 경찰측이 웬일로 평화시위 시 길을 터주겠다고 제안하자 앉아서 행진을 계속하였으나 경찰은 사정없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 과정에서 이석규는 오른쪽 가슴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고, 결국 그는 병원 이송 후 오후 3시 30분경에 눈을 감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