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선희(야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농협 야구단]] 소속으로 뛰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좌완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입단 직후부터 두각을 드러낸 이선희는 1년차에 실업야구 올스타로 뽑히고, 2년차에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경리단 복무 시절이던 1977~78년 동안 [[노히트 노런]]을 두 번 기록하고, 1978년에는 실업 리그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제 무대에서는 [[일본]]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원조 [[일본]] 킬러'''로[* 이후 일본에 강한 후배 좌완투수들에게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영예롭게 붙여졌다. 이선희 이후 [[김기범(야구)|김기범]], [[구대성]], [[봉중근]], [[김광현]] 등이 일본 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름이 높았고,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대회에서는 다승왕, 구원왕, 대회 MVP를 수상하며 '''[[대한민국]] 야구의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감독은 훗날 해태의 절대강자 시대를 이끈 [[김응용]]이었다.] 일본전에 유독 강한 데다가 군복무를 마친 젊은 좌투수이다 보니 NPB , MLB 스카우트들도 매의 눈으로 지켜봤으나, 자의반타의반으로 1981년까지 실업 리그를 지켰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 [[이만수]], [[장태수(1957)|장태수]], [[황규봉]], [[함학수]], [[오대석]] 등과 함께 삼성의 원년 멤버로 활동했다. [[파일:/image/280/2008/04/26/20084268571125335.jpg]] 그러나 프로야구 출범 후 그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한국프로야구의 성공에 공헌한 숨은 주역'''으로 변신하게 된다. 바로 원년 개막전,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 맞은 만루홈런 두 방 때문. 프로야구 사에서 그가 겪은 불운은 1982년 3월 27일 서울 운동장 야구장(당시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열린 개막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MBC 청룡]]과의 대결에서 7:7 동점 상황이었던 연장 10회 말, 7회부터 등판해 2이닝을 무실점으로 호투한 이선희는 내야수 [[김인식(1953)|김인식]][* 현 [[연천 미라클]]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감독을 지낸 [[김인식]]과는 동명이인.]을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낸 뒤 [[김용달]]에게 2루타를 허용, 1사 2, 3루의 위기를 맞았다. 다음 타자는 7회말 동점 3점포를 쏘아 올린 4번 타자 [[유승안]]. 5번 [[백인천]]과의 외나무다리 승부를 감수하며 그를 [[고의사구]]로 거르려 했지만, ~~그날 경기 수훈 선수 상품인 [[오토바이]]에 눈이 먼~~[* 결국 오토바이는 끝내기 만루 포의 주인공 [[이종도]]에게 돌아갔고, 참고로 이날 프로 1호 타점과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와 1호 홈런 부상으로 피아노를 받았다.] [[유승안]]이 바깥쪽 볼에 무리하게 배트를 갖다대는 바람에 3루 주자 김인식이 홈에서 태그 아웃당하며 본의 아니게 한숨을 돌렸다. 2사 주자 1, 3루 상황으로 돌변한 후, 이선희는 후속 타자인 백전노장 [[백인천]]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만루를 채우며 [[이종도]]와 승부하고자 했는데, 결과는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 였다.[* 2022년 기준에도 끝내기 만루포는 단 '''9번'''만 나올정도로 진기록이다.] 그의 불운은 시즌을 마무리짓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삼성이 [[OB 베어스]]에 1승 1무 3패로 몰렸던 6차전에 선발 등판한 이선희는 8회까지 3실점으로 잘 버텼으나 9회초 2사 만루에서 [[신경식(야구)|신경식]]에게 밀어내기 볼넷으로 3-4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후속 타자 [[김유동]]에게 또 만루홈런을 허용하였고, --[[김거김|신거김]]-- 그렇게 시리즈는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김유동에게 만루포를 얻어맞은 뒤 이선희는 [[황규봉]]에게 마운드를 넘겨준 후 덕아웃 옆에서 글러브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참고로 결승점은 밀어내기 타점으로 났지만, 만루홈런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였는지 만루홈런을 역전홈런으로 아는 이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이선희는 '''"한국프로야구의 원년을 빛낸 비운의 투수"'''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그나마 이건 양호한 평가이다. [[김은식]]에 따르면 삼성의 처음과 끝을 말아먹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해 김은식은 [[서영무]] 감독이 체력이 떨어진 이선희를 계속 마운드에 방치한 것을 첫째 원인으로 평가했다. 즉 이선희만의 잘못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 이와 비슷한 참사가 2년 후 경기인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최종 7차전 선발로 재일교포 에이스 [[김일융]]을 내세웠는데 경기 중반 이후부터 체력에 한계를 느끼면서 몇 번이나 삼성 덕아웃과 불펜을 바라봤다. 하지만 삼성 벤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8회초 위기 상황에 닥치고서야 부랴부랴 [[황규봉]]을 준비시켰다. 결국 김일융은 [[유두열]]에게 결승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강판됐고 삼성은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 원년 시즌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 [[황규봉]]과 함께 나란히 15승 트로이카로 삼성 마운드를 이끌었지만 만루 홈런 두 방의 충격이 컸던지 1983 시즌 후 두 번 다시 두 자리 승수를 올리지 못했고[* 이선희는 빠른년생이라 82년 당시 사실상 30줄에 접어든 상태였고, 실업야구 포함 10년차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었기에 하락세가 오는 게 정상이었다. 실업야구 시절 혹사에, 그간 국가대표팀 단골 멤버로 불려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하락세가 더 일찍 올 법 했는데도, 노장 소리가 솔솔 나오던 1981년까지 대표팀에 선발되며 빼어난 활약을 하였고 프로에서도 (임팩트가 안 좋아서 그렇지) 첫 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자기관리를 매우 잘했다는 뜻이다.] 1985년 1월 5일 [[이해창(1953)|이해창]]과의 맞트레이드로 ~~철천지 원수~~[[MBC 청룡]]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된 그 해 친정 팀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며, 팔을 언더스로 수준까지 내렸음에도 끝내 옛 모습은 회복 못하고 1987시즌 후 은퇴했다.[* MBC 시절을 포함하면 LG의 트레이드 잔혹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