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성가 (문단 편집) == 백선엽의 회고 == >영천전투의 영웅, 李成佳 장군 > >이성가(李成佳·1922~1975) 장군 하면 ‘영천전투’가 떠오른다. 그는 5군단장을 역임한 전형적 야전군인이다. 전쟁 발발 당시 강릉-동해안을 담당하는 8사단장으로 전투를 치렀다. 그는 낙동강전선에서 북진까지 8사단장으로 내리 부대를 지휘했다. > >특히 전쟁 초기 강릉-주문진 전투에서 8사단 장병들을 잃지 않아 대관령에서 6사단과 함께 지연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8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대구와 경주를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김일성의 기도(企圖)를 좌절시켰다. 그는 7사단장으로 백석산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 >1922년 만주 퉁화(通化)에서 출생한 그는 신흥무관학교 칠도구분교장(七道溝分校長)을 지낸 부친 이관석(李寬錫)의 유언에 따라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중국 왕정위(王精衛) 군대에 들어갔다. > >그는 중국군 소령으로 진급, 12군사령부 인사참모를 지냈다. 광복 무렵 중국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 북경책임자 진영륜 소장 권유로 그 밑에서 정보기관원으로 활동했다. >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6년 6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부위(중위)로 임관했다. 1연대 창설요원, 4연대장을 지냈고,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 10월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을 했다. 이형근 장군 후임으로 8사단장이 됐다. >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38선을 방어하는 10연대에 적을 저지하도록 하고, 삼척에 주둔하고 있는 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主)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천연장애물’인 하천을 이용해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는 강릉지구 전투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 >육본은 이성가 대령에게 “원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단양에서 남한강 남안(南岸)에 2개 연대를 배치해 북한군 8사단의 남진을 6일간 막았다. > >어쩔 수 없게 된 북한군은 충주방면 12사단을 이 지역에 투입하게 됐고, 아군이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만들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자, 그의 사단은 1950년 9월 영천지역을 통해 대구와 경주로 진출하는 북한군 15사단의 주력을 궤멸시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반격작전 때는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는 2군단에 배속돼 희천-묘향산 지역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눈물을 삼키며 38선으로 철수했다. > >7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강원도 양구지역에서 중공군과 백석산,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접전을 벌여 승리를 맛봤다. 휴전 이후 1군사령부 부사령관, 3군단장, 5군단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1962년 3월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이나 큰 전공에 비해 '''관운(官運)은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1975년 3월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