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성가 (문단 편집) ==== 숙군에 기여 ==== 1946년 11월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구 일본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군인)|김창룡]] 소위를 연대 정보 주임 보좌관으로 등용하여 정보소대를 맡기고 연대 내 숙군을 단행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1685977|#]] [[왕징웨이]]군 - [[국민혁명군]], [[남의사]] 활동을 통해 이념 및 사상사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의 감에서 나온 활동이었다. > 본격적인 숙군작업은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수반난]]이후 시작됐다. 전후 4차에 걸쳐 장교 1백26명, 사병 1천1백70명을 숙청하면서 그중 다수를 총살처분했다. > 그러나 이같은 전군적인 숙군작업에 앞서 서울의 태능에 주둔한 제l연대(연대장 이성가소령)에서는 자체적으로 숙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 비록 군내 일부의 부분적인 좌익제거작업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숙군작업의 선도적 모델이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 연대장 이성가 소령은 수도 서울에 주둔한 국군의 선발부대격인 제1연대에 좌익조직이 침투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여 그 색출작업에 나섰다. > 이 작업의 챔피언으로 발탁된 것이 3기생인 일본 관동군 헌병오장출신의 김창룡 소위였다. 이성가 소령은 김 소위를 연대 정보주임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정보소대를 편성케하여 연대 내의 사상사찰을 전담시켰다. > 일찍이 장개석군·왕정위군에 소속되어 군내에서의 사상 사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성가 소령이 체험을 통해 얻은 소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 김창룡 소위는 일제 하에서 경찰관이나 헌병을 지낸 경험자들을 특채하여 정보소대를 구성하여 우선 연대 내의 좌익 색출에 나섰다. 이 정보소대 요원들이 나중에 창설되는 육군특무대(후에 방첩대·보안사로 발전)의 주축을 이루었다. > 김창룡 소위는 우선 연대의 선임 대대장인 이병주 소령의 동향을 수상히 여겨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 그는 대원들을 개성·문산·포천·의정부·인천·수원 등에 배치하여 충남 출신의 2기생인 노재길 등 연대 내 좌익계 일당 8명을 검거하고 그들이 문산의 다리밑에 숨겨두었던 무기들을 압수했다. > 조사결과 배후 인물은 이병주 소령임이 밝혀졌다. 이 소령은 47년 3월 18일자로 대대장에서 군기대장(헌병)으로 전임되어 있었다. > 김소위는 이병주소령이 5월21일자로 청주의 제7연대 연대장으로 전출명령을 받자 대원들을 이끌고 청주에 가 있다가 부임하는 이소령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 이들은 미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이병위는 5년형을 선고받아 47년 10월 파면됐고 나머지 일당은 3년형을 선고 받았다. > 47년 8월 15일 광복2주년 기념행사에 재1연대가 시가행진을 하게됐다. 연대 내의 좌익계 잔당들은 행진에 참여할 병력이 수통에 물을 준비해 나갈것이라고 예상하고 15일 아침 연대 우물에 독약을 타기로 계획했다. > 그러나 김창룡의 정보소대가 이 정보를 입수하여 최희섭 일병을 극렬한 좌익분자로 위장시켜 좌익조직에 침투시졌다. > 최 일병은 거사 계획과 관련자 전원을 탐지해 내어 8월12일 검거함으로써 독살극을 미연에 방지했다. 최 일병은 후에 장교로 임관하여 6·25때 소령으로 전사했다. > 이처럼 1연대에서는 이성가 연대장의 과감한 조처와 김창룡 소위의 민완한 활동으로 연대 내의 좌익조직이 일찍이 제거되어 큰 소요 없이 6·25를 맞게됐다. > 다른 연대에서는 연대 정보과(S2)에서 사상사찰 문제를 맡고 있었으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결국 대숙군을 겪어야했다. > ---- > 《중앙일보》 1983년 3월 19일자 〈육사졸업생들〉 (118) [[https://news.joins.com/article/1685364|숙군의 시작]] >배진영의 기무사(機務司) 비록 ① 특무대의 탄생과 김창룡의 시대 (월간조선 2016년 5월) > > 서울역 앞에서 거적을 덮어쓰고 노숙하던 김창룡은 1946년 5월, 만주에서 알고 지내던 박기병(예비역 육군소장) 소위와 조우했다. 계획을 묻는 박기병에게 김창룡은 말했다. “나는 공산당에 쫓겨 사선(死線)을 넘어왔소. 공산당을 때려잡으려면 무슨 일을 하면 좋겠소?” > >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김창룡은 5연대를 거쳐 3연대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다 1947년 1월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입교 당시 면접을 본 심사장교 백남권 중위는 일본 헌병 출신인 김창룡을 좋게 보지 않았다. 떨어뜨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김창룡은 고함을 질렀다. > > “해방이 되어 조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일본군에서 배운 군사지식을 쏟아내 헌신하겠습니다!” > >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제1연대로 배속됐다. 1연대장은 이성가(예비역 육군소장) 소령이었다. 중국군 출신인 이성가 소령은 이념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창룡 소위를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해 부대 내 좌익세력을 색출해 내도록 지시했다. 김창룡은 정보과 사무실 내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에 매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