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성가 (문단 편집) ==== [[영천·신녕전투]] ====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이 3개 사단을 집중한 주공이 패퇴하고 8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대구 북방 다부동 공격에 참가했던 북한군 15사단은 당시 8사단이 방어하던 영천 방면으로 전환 투입됐다. 영천은 대구와 경주 양방향으로 진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만약 영천 방면으로 돌파한 북한군이 서쪽으로 향한다면 6사단과 1사단이, 동쪽으로 향한다면 수도사단과 3사단이 측후방을 위협받게 됨으로써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위험성이 컸다. 이 상황에서 8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 특히 미 극동군 사령부와 미8군 사령부는 피아 전투력비가 완전히 역전되어 북한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공세이전 계획 수립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대구 북방에서의 공세가 실패한지 열흘만에 다시 총공격을 가해왔다. 9월 공세의 시작이었다. 미 2사단이 담당하던 영산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주요 고지를 탈취당해 일시적으로 사단 책임구역이 둘로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미 25사단도 함안을 빼앗기고 수세에 몰렸다. 위기는 미군이 담당하던 낙동강 서부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 구역은 물론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던 동부전선에서도 북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은 영천이었다. 잡다한 잔존 병력 및 766부대를 배속받아 증강된 북한군 15사단은 8사단이 맡고 있던 영천 방면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둔다. 9월 5일경 영천 동북쪽의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함으로써 착잡한 산악지형이 연속되는 특성상 대부대의 기동과 보급이 어렵다고 여겨지던 영천 북방에서 8사단의 저항을 무너뜨린 데 이어, 9월 6일에는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 이 정도 크기의 돌파구가 뚫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하고 서사모아 제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New Korea Plan'을 준비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8사단은 육본 지시로 1군단 예하에서 2군단 예하로 소속이 변경된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전선을 유지하던 1사단과 6사단에서 증원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이성가 대령에게 8사단 병력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하여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토록 한 후,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차출하여 7사단 주력[* 5, 8연대와 공병대대]과 함께 영천 시내로 역습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습 위협과 지형상의 문제로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았던 북한군 15사단의 공세탄력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9월 9일 2군단장 명령에 의거, 영천 일대에 낚싯바늘 형태로 포진한 한국군 6개 연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완전히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와해됐고, 한국군은 영천 시내는 물론 북방의 고지군까지 장악하면서 13일 경에는 원 방어진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드라마틱한 승리로 바꿨다는 점에서 '대회전'으로 평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