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세돌 (문단 편집) === 전성기 === || [[파일:060804-leesd3.jpg|width=250]] || || '''전성기를 맞은 [[2006년]]''' || >'''大李未走 小李又至'''(대리미주 소리우지)[*발음 dà lǐ wèi zou xiao lǐ yòu zhì] >[[이창호|대리(大李)]]가 아직 가지 않았는데 '''또 소리(小李)가 오다니''' >---- >중국 체육주보에 나온 표제 이세돌의 전성기로는 통상적으로 세계대회 첫 우승을 거둔 2002년부터 마지막 우승을 한 2012년까지를 꼽는다. 이창호의 시대를 무너뜨린 [[소장파]] 기사의 선두이다.[* 이세돌 본인도 '타도 이창호'에 매우 열심이었던 듯. 모 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직 입단하기 전 기원에서 바둑 공부할 때 이창호 9단이 가끔씩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둘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옆에 앉아 이창호 9단의 손만 빤히 쳐다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창호 9단은 추후 본인의 저서에서 라이벌을 소개할 때 요다 9단과 루이 9단과 같이 이세돌을 뽑았다.] 2000년대 초중반 이창호와 이세돌의 승부는 바둑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2003년에 열린 제7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5번기에서 이세돌이 이겼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다. 당시 이창호는 제1회 춘란배 결승에서 스승인 조훈현에게 패한 이후 4년간 국제 대회의 결승에서 무패행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세돌에게 최초로 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기사 모두 사력을 다한 승부였기에 이긴 이세돌도 탈진, 진 이창호는 생전 안 하던 술을 마시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창호를 이기는 후세대 기사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한다. 중국 바둑리그에 용병으로 참가하면서 이기면 돈을 받고 지면 돈을 받지 않는 계약을 최초로 한 한국 바둑기사이기도 했다. [[http://www.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A1&num=507876&pageNo=2&cmt_n=0&search_div=news_title&search_keyword=%B0%A9%C1%B6%B8%AE%B1%D7|2006년 중국갑조리그 관련기사]] 이세돌 이후부터 한국기사들은 용병으로 참가할 때 비슷한 조건을 달고 출전하는 경우가 늘었다. 심지어 5빵(이기면 '''5만 위안''', 지면 '''없음'''), 7빵이라는 [[http://cyberoro.com/news/news_view.oro?div_no=A1&num=513741&pageNo=2&cmt_n=0&search_div=news_content&search_keyword=%B0%E8%BE%E0|프로기사들 사이의 은어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2009년, 한창 전성기 중에 6개월간 휴직계를 낸 적이 있다. 당시 기보 저작권 문제 및 대국료 문제[* 이전까지 한국기원은 중국리그를 정식기전으로 인정하지 않아 한국리그 일정과 겹칠 때 대국일정을 전혀 조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리그와 중국리그 모두 계약을 맺은 이세돌은 예를 들면 중국리그 시합이 끝난 날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귀국하여 바로 한국리그 대국을 하는 등 꽤 고생을 했고 이는 당시 다른 정상급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리그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원은 중국리그 승리수당 10%를 공제하겠다고 주장하였고 이세돌은 일정조정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로 한국기원과 갈등을 겪다, 2009 한국바둑리그 불참을 선언하자 기사회에서 징계를 내린 것. 결국 이세돌은 '휴직계'를 내버렸다.[* 바둑의 인기가 예전 같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1인자이자 최고 인기기사인 이세돌의 바둑리그 참가는 필수적이었고, 심지어 신안군은 이세돌의 고향 비금도가 속한 기초자치단체로 그의 참가를 바라며 "신안 천일염" 팀을 창단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돌연 불참한 것이다.] 이후 이세돌은 사과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https://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12741&agree=1|'이세돌 휴직사태 기자회견']]. 우여곡절 끝에 한국기원과의 앙금을 청산하고, 바둑기사에 복직하자마자 파죽의 24연승을 달린다. 2010년 제2회 BC카드배 16강에서 중국 랭킹 1위이던 [[쿵제]]를 상대로 초반에 대마가 잡혀 약 85집을 잃은 상태에서 대역전승을 거두고,[* 그날 인터뷰에서는 초반에 밀려서 그냥 두는데에 의의를 뒀다고.] 결승에서 창하오 九단을 3:0으로 압살하면서 세계 타이틀 하나를 더 추가한다. 세 판 모두 불계승.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바둑 종목이 추가되었고, 이세돌 九단도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결과는 한국이 전 종목(남자단체, 여자단체, 혼성페어)을 석권하였고(금3, 동1), 이세돌 역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자세한 내용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바둑]] 문서 참조. || [[파일:이세돌_2011.jpg|width=250]] || || [[트레이드 마크]] 장발.[* 페이스북의 2011년 프로필 사진으로, 2011년 4월 구리 九단과의 제3회 BC카드배 결승 대국 당시에 촬영된 것. 머리를 손질하는 게 귀찮은지, 미용실을 가는 주기가 거의 1년이라 머리 길이가 장발급으로 길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 2011년 4월에 제3회 [[BC카드배]] 결승에서 라이벌 구리 九단을 상대로 3:2 신승을 거두고 BC카드배 2회 연속 제패에 성공했다. [[2012년]] 12월 13일,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에서 [[구리(바둑기사)|구리]] 九단을 1국 반집승, 2국 불계패, 3국 반집승으로 총 한집(반집+반집)으로 물리치는 희대의 드라마를 찍으며 2:1로 우승했다. 삼성화재배 통산 4번째 우승. 구리 九단과의 상대전적도 10승 1무 14패로 약간 만회했다. 2013년 1월 [[합천군]] 초청 '2013 새로운 물결, 영재 정상 바둑대결'에서 [[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1129029.htm|유일하게 승리했다]]. 최연소 프로기사 [[신진서]] 당시 初단이 이창호를 불계승으로 꺾어 파란을 일으킨 이 대회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승리한 것. 대회 후기에 따르면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 일부러 반집승으로 유도했다고 한다. 그러고서 "요즘 애들은 왜 다들 이렇게 똑같나"라고 했다고. 정말이라면 그다운 발언이라 할 수 있겠다. [[2014년]], 동갑이자 최대의 라이벌인 [[구리(바둑기사)|구리]] 九단과의 10번기를 시작했다. 이세돌-구리 10번기는 제한시간이 4시간에 1분 초읽기 5회. 월드컵 기간인 6월을 제외하고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에 개최되며 먼저 6승자가 나오면 종료된다. 승자는 우승상금 500만 위안(약 8억 4000만 원)을 독식하고, 패자에게는 20만 위안(약 3500만 원)의 여비가 지급된다. 단, 최종 성적이 5승 5패일 경우 상금을 절반씩 나눈다. 자세한 내용은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 문서를 참고. 이세돌 9단이 6승 2패로 승리했다. [[2016년]]에는 연초부터 굵직한 대국을 여럿 치렀다. 몽백합배 결승전에서 [[커제]]와 접전 끝에 준우승을 했고, 이후 [[박정환(바둑기사)|박정환]] 9단과 제34기 KBS바둑왕전, 제43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에서 결승대결을 펼치면서 일명 8번기를 펼쳤다.[* 명인전 결승 5번기 + 바둑왕전 결승 3번기.] 바둑왕전에서는 박정환에게 첫 판을 딴 후 내리 두 판을 내주며 준우승했으나, 명인전에서는 3승 1패로 박정환을 꺾으며 통산 4번째 명인전 우승을 차지하여 2014년 렛츠런파크배 오픈토너먼트 이후 오랜만에 국내기전 우승을 차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