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세황제 (문단 편집) == 탄생에서 즉위까지 ==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은데 《[[사기(역사책)|사기]]》 〈진본기〉(秦本紀)에 의하면 호해가 등극할 때의 나이가 12세였다고 하고, 〈진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는 2세 황제 원년에 그의 나이가 21세였다고 되어 있다. 〈진시황 본기〉의 내용에 따라서 역산하면 출생연도를 기원전 229년으로 추정한다. 야사에선 호해를 낳았다고 알려진 [[궁녀]]가 [[형가]]에 의한 시황제 암살 미수 사건 때 시황제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해는 [[시황제]]의 18번째 아들였고 황후 소생이 아닌 서자였기 때문에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에게는 천하의 모사꾼 [[조고]](趙高)가 있었다. 기원전 210년, 진 시황이 순행에 나서면서 호해와 조고도 동행했는데 진 시황이 사구에 이르렀을 때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고 말았다. 《[[사기(역사책)|사기]]》에 의하면 진 시황은 장남인 [[부소]]가 제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으나 조고가 승상 [[이사(전국시대)|이사]](李斯)와 짜고 '''진 시황의 유서를 날조해''' 호해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으로 조작하고 부소와 [[몽염]]에게는 자결하라는 명을 위조했다고 한다.('''[[사구정변]]''') 문제는 '과연 《사기》의 기록대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당시 세간의 인식이 호해의 등극을 곱지 않게 바라봤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편으로 진 시황이 말년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더해졌고, 판단력도 흐려져서 호해에게 제위를 승계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호해와 이사가 조고에게 설득되어서 이러한 날조에 동참했음을 설명하며, 그들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처음 호해와 이사는 죽은 시황제의 어마어마한 권위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받은 교육과 학문,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정변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서 조작과 황위 찬탈을 거부했다. 특히 단순한 무뇌아로 인식되는 호해는 적어도 이때만큼은 진 제국의 법령과 시황제의 지시, 그리고 형 부소의 계승 정당성 등을 거론하며 조고의 설득을 두 번 넘게 거절하나, 조고는 여러 궤변 및 감언이설로 호해를 녹이며 결국 설득하게 된다. 사실 허망한 자살로 인해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부소는 실제로도 진 제국 전반에서 최소한의 인망은 얻고 있었고, 그를 수호하는 장군 몽염 또한 정복 전쟁 당시부터 맹활약했던 조부 몽오, 부친 몽무와 더불어 여러 차례 전공을 올린 장수였다. 거기에 그들이 있었던 장성에는 이민족 방어를 위한 강력한 군세가 있었으므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도박을 해볼만 했으나,[* 민중이나 중신의 여론을 잡고 있었던 만큼 마냥 불리하지만은 않은 게임이었을 것이다.] 부소가 거짓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서 진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호해는 가장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형 [[부소]]와 명장 [[몽염]], 우승상 풍거질(馮去疾), 대장군 풍겁(馮劫) 등을 제거했으며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와 누이 20여 명도 [[숙청]]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특이한 사실은 형제뿐 아니라 누이들도 숙청했다는 것이다.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여자가 왕이나 황제가 되는건 예외적이었고, 심지어 그런 이들도 거의 대다수는 탈법적인 방식으로 오르거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감안해보면 호해가 무슨 이유로 누이들까지 죽였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형제들보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누이들이 더 잔혹하게 죽었다. '나는 친인척도 안봐주는 사람이니까 어리다고 얕보지 말고 알아서 기어라'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시황릉]]의 배장갱 중에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막상 묻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헤드샷|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석궁으로 뒤통수를 쏘아죽였다.]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그의 형제, 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 누이 10명은 [[거열형|가장 잔혹하게 사지를 찢어죽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진시황릉 발굴 때 발견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팔다리가 인위적으로 절단되어 나란히 포개져서 묻힌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사기》에 묘사된 잔혹한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특히 《사기》 〈[[이사(전국시대)|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公子 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배장갱 중 딱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 비록 공자 고는 죽었지만 먼저 자살을 청한 덕에 그의 일족은 숙청을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년 후 [[항우]]가 함양을 함락하고 영성 조씨 황족들을 몰살시켰다고 하니 결국 그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주 유명한 [[야사(역사)|야사]]로 진 시황이 불로장생초를 찾으라 보낸 수많은 종자들 중 한 명이 신선을 만나 [[불로초]]를 부탁하자 그 신선은 '《천록비결》'이라는 책을 건네주고 그 글귀를 해독하면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고 했다. 종자가 진 시황에게 책을 바친 후 수많은 학자들이 달라붙어 해독했지만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은 호(胡)다."라는 한마디만을 해석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시황제는 이를 듣고는 '胡'를 오랑캐라는 뜻 그대로 해석하여 북방의 [[흉노]] 등으로 생각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했으나 실상은 막내 아들 호해를 일컫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이미지가 여러모로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물론 이는 진나라의 멸망 후에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 역사상 이런 예언류의 글들은 대부분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만들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